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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Nov 07. 2024

문해력이 어떻다고?

  60년대 군사정부시절 학교에 커다랗게 써놓은 ‘인간개조’라는 말을 읽기는 해도 무슨 뜻인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거꾸로 읽어보니 ‘조개’라는 말은 알 수 있었으나 이번에는 조개를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를 모르겠다. 나중에야 그것이 ‘인간을 송두리째 바꾸자’라는 무서운 말인 것을 알았다. 아무리 독재정권이라지만 초등학교에 왜 그런 주문 같은 말을 써 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때에 논에는 ‘소주밀식’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기도 했다. 웬만한 사람들은 ‘소주는 몰래 먹어야 한다’라고 풀이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벼포기를 조금씩 줄여서 촘촘하게 심으라’라는 말이었다. 한참 후에 고속도로에는 ‘노견 없음’이란 수수께끼도 있었다. 고속도로에 유기견이 그렇게 많을 리 없을 텐데- 나중에 알고보니 ‘갓길 없음’이란 뜻이었다. 몇 년 전에는 ‘소부장’이라는 암호가 자주 들렸는데 알고보니 ‘소재, 부품, 장비’라는 뜻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쓰는 말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일이 참 많다.  

 

  지금의 학생들은 옛날보다 더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그래도 옛날에는 학교에서 한자를  가르쳤지만 지금은 ‘한글사랑’이 커서 아예 한자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족보는 ‘족발보쌈’이 되고, 무설탕은 ‘사탕무로 만든 설탕’이라 하고, 개천절은 ‘개천에 있는 절’이라고 하고, 심지어 ‘사흘’과 ‘사일’을 구분하지 못한다고도 한다. 한자를 가르치지 않으니 학년이 올라가고, 대학에 들어가도 이렇게 웃픈 코미디는 계속되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고서도 '사회적 문맹'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국어사랑'이라는 말이 그저 공허할 뿐이다.  


  우리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자어는 우리 고유어 대신에 중국의 한자를 빌어다 쓰다보니 새로 만들어진 말이다. 한자를 쓸 때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한자를 가르치지 않다 보니 한글로 표기된 한자어는 발음기호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자를 인식할 때는 한글만으로도 충분히 소통될 수 있었으나 한자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 단어는 의미를 상실한 말이다. 지금 영어단어를 한글로 적은 것이나 다름없다. 영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노인들한테는 그것은 역시 한자어처럼 발음기호에 불과하지 않은가?  

 

 한자교육의 필요성은 옛날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주체의식과 한글의 우수성에 묻혀버렸다. 한글이 세계적인 자랑거리는 틀림없지만 한자어휘를 한글로만 적고, 한자를 모른다면 그 우수성은 불통으로 전락할 수 있다. 아무리 한자가 어려워도 이천 년을 내려온 한자를 일시에 퇴출시킨다면 소통단절이요, 야만적인 언어문화 파괴행위이다. 한자를 퇴출시키는 것은 맞지만 상당한 경과기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한자어를 고유어로 대체한 다음에야 한자퇴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민족을 가름하는 언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천 년을 이어왔으니 적어도 몇 세대에 걸친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한자어를 고유어로 바꾼 다음에야 한글전용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당국자는 손을 놓고 있고, 매체들은 생소한 한자어를 남발하기에 바쁘다. ‘물막이벽’이라고 하면 될 일을 한자도 없이 방수벽(防水壁), 큰 파도를 월파(越波), ‘소금물’을 염수(鹽水), '쓰레기 가려 버리기'를 '쓰레기 분리배출(分離排出)'이라고 해대니 한자를 모르는 세대들한테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이다. 소통하자는 말인지, 언어유희를 하자는 말인지- 


  요즈음 새삼스럽게 문해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문장을 읽어도 그 뜻을 모른다면 소통이 될 리 없다. 그게 어디 문장에서만 그럴까-  우리가 늘 사용하는 구어나 대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이 가지고 있는 사전적 의미마저 통할 수 없다면 그 상징적 의미는 말할 것도 없고, 더구나 말속에 숨어있는 비유, 상징, 유추와 같은 고등사고를 필요로 하는 의사소통력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부랴부랴 논술학원에 보내거나 일시적인 독서운동으로 그것을 해결하려 든다면 참 슬픈 일이다. 바보들아-  ‘문해력 장애는 한자는 모르고, 한글로만 적기 때문이야- '


 문해력 장애는 비단 젊은이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금 사회적 갈등의 하나인 광복절-건국절도 역시 문해력의 문제이다. ‘나라를 다시 찾은’ 光復節과 ‘나라를 새로 세운’ 建國節을 구분하지 못하는 고등문맹들이 허다하지만 이는 전혀 다른 뜻이다. 광복절은 ‘역사를 계승한 개념’이지만 건국절은 ‘오천 년 역사와 헌법을 부정’하는 반역사적 사고방식이다. 친일파 ‘독립기념관장’을 두고 다투고 있지만 ‘독립기념’이란 이름은 우리가 ‘처음 독립했다’는 뜻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이니 애초부터 ‘광복기념관’이어야 했다. 그 날은 신생독립이 아니라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은 날이다. 문해력이 모자라면 당연히 사고능력, 정신수준도 낮아지는 것이다.     


  정신수준이 낮다보니 문제의 본질을 읽지 못하고 변죽에서 헤매는 것이 우리의 고질인 것 같다. 언론매체의 보도나 각종 청문회, 토론회를 들어보면 문제의 본질을 보는 통찰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매체들은 기레기들이 들끓어 사건의 본질을 모르고, 청문회에서는 추궁하는 자나 답변하는 자들이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 핏대만 높이고, 東問西答을 일삼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청문회 무용론도 나오지 않는가? 이 모두가 사고수준이 낮아서 문제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문해력을 해결한다고 기껏 학원이나 독서운동을 벌이는 것은 隔靴搔癢(격화소양- 구두신고 가려운 발 긁기)이다. 문제의 본질을 찾는 것은 단어의 본의나 상징성부터 통찰해야 가능한 일이다. 국어의 7할을 차지하는 한자어의 한자를 모른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 근본대책은 '최소한의 한자를 가르치면서 한자어를 고유어로 대체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이는 것'이다. 수천 년 이어져 온 한자는 '피치 못할 문화적 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오늘날의 문해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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