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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추석

by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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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추석'이라면 얼핏 참신한 역설이나 창의적인 반어법으로 들린다. 그만큼 엉뚱하고 생소한 말이지만 어엿한 현실이 되어버렸다. 몇 년전만 해도 추석이면 겉옷까지 챙겨입어야 했었다. 그러고서도 한낮이 아니면 더운 줄도 몰랐다. 그러나 이번 추석날은 아침부터 더워서 창문을 활짝 열어야 했고, 낮에는 30도가 넘는 후끈한 열기가 밀고 들어왔다. 선풍기로는 모자라 에어컨을 트는 집도 많았을 것이다. '에어콘추석'이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이러니 곡식이건, 과일이건 영글 리가 없다. 추석이면 햅쌀로 차례를 지내고, 감과 대추가 떨어지고, 알밤이 튕겨져나와 뒹굴었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차례와 성묘가는 길은 즐거운 추억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그런 풍요로운 모습을 구경할 수 없게 되었다. 윤달이 있다고는 하지만 10월인데도 가을은 아직도 저만치다. 경제사정이 좋아졌는데도 ‘더도말고 덜도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무색한 추석이다.


추석이란 일년농사를 수확하고, 하늘과 조상에 감사와 은덕을 기리는 날이다. 추석의

핵심은 조상의 묘를 찾아서 성묘(省墓) - 조상 묘를 보살피는 - 에 있었다. 성묘란 농경사회의 전형적인 문화이다. 유목민들은 일정한 묘조차 따로 없으니 성묘문화가 없다. 수확이 없어 하늘에 바칠 제물도 없고, 조상에 바칠 음식도 없고, 날씨마저 무덥다면 추석은 추석이 아니다. 지금은 3, 4차산업시대라 추수의 중요성이 떨어졌지만 그렇다고 추석 본래의 문화적 가치가 달라진 것은 없다. 그러나 현실은 추수의 풍요도 없고, 상쾌한 가을 날씨도 아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무더운 여름추석을 고집해야 할지 의문이다.


추석은 가장 오래된 풍속이다. 그 분포도 원산지 중국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일본, 심지어 동남아까지 같은 날짜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곡식을 수확하는 시기는 기후에 따라 지역마다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추석이 모두 한 날이라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추석이라면 지역마다 기후에 합당한 날이 따로 있어야 옳다. 추석 말고도 우리 생활에 녹아있는 24절기도 지역을 불문하고 역시 같은 날이다. 다행히 우리 기후에 부합되는 일이 많아서 좋았지만 기후변화에 따라서 24절기는 어긋나는 일이 더 많아지고 있다. 秋分이 지난 지가 2주가 넘었지만 가을은 아직도 오지 않았으니 추분이 아니다. 중국에서 기원한 24절기가 우리와 비슷한 이유는 그것의 발상지가 우리와 위도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24절기의 발상지는 중국의 西安일대라고 한다. 그것이 형성된 시대는 秦漢(진한)시대라는데 그때의 도읍지가 서안 부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와 가까운 산동지방도 서안과 비슷한 위도였고, 우리 또한 그렇기 때문에 추석이건, 24절기건 우리 기후에 부합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중국인들은 우리가 자기들의 단오, 추석을 훔쳐갔다고 흥분하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문화의 흐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무지이다. 우리의 기술이나 문화콘텐츠를 몰래 빼가는 것이야말로 훔치는 것이다.


기후급변에 따라서 추석과 24절기는 점점 그 의미를 살리기 어려워지고 있다. 수확도 없고, 가을도 아니고, 선영을 찾아가기 어렵다면 추석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추석 날짜를 구태여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秋夕이란 글자 그대로 ‘가을밤’이다. 우리 고유어로 말해도 한가위, 역시 ‘한가을’이다. 중국에서는 秋夕이란 그저 가을밤일 뿐이고, 그들은 仲秋節(중추절)이라고 한다. 그래도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여름에 추석을 지낸다면 이름에 걸맞지 않다. 이는 베들레헴에서 화이트크리스마스를 고집하는 것이 아닐까? 기후를 바꿀 수 없다면 이참에 본래의 의미와 기후에 맞게 과감히 추석 날짜를 바꾸는 것이 어떨까 싶다. 전통을 고수하기보다는 계절의 감각과 농산물의 상황에 맞추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특히 노인, 구세대들이 그럴 것 같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통을 함부로 바꾼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전통이란 지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전통이란 오랜 경험을 통해서 합의된 생활의 지혜이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전통에 얽매어 불합리와 불편을 참았다면 인류의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인류의 발전과 행복에 어긋나는 문화는 전통이 아니라 인습이라고 한다. 기후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추석날짜를 고수한다면 인습이 아닐까? 신세대에게는 추석이란 연휴라는 의미가 더 큰 듯하다. 추석을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한다면 어차피 날짜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성세대만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다면 추석날을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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