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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날 되세요.

좋은 날 보내세요.

by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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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좋은 날 되세요.’라는 아침인사말을 많이 듣는다. 옛날에는 잘 들어본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근래 새로 만들어진 말인 것 같다. 혹시 영어의 영향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해본다. ‘좋은 아침입니다.’가 ‘Good morning’에서 온 말이듯, 서양인들이 즐겨하는 말이 ‘Yo have a good day, - nice day’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have’라고 했지 ‘되라’고는 하지 않았다. 적어도 have에는 능동의 뜻이 강하다. 그런데 왜 수동적인 표현인 ‘되다’라고 말할까라는 아쉬움이 있다. 언어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이론으로 말하면 능동적인 언어는 능동적 인간을, 수동적인 언어는 수동적인 인간을 만들 것이다. ‘좋은 날이 되라’는 ‘좋은 날을 만들다, 보내라’와는 그런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괜히 일삼는 말 같지만 혹시 소극적, 수동적인 의식이 말에 드러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원래 우리의 어법에는 영어에 비해서 수동적인 표현이 적었다. 영어에는 態 - Voice라는 문법이 큰 비중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 비해서 수동태의 표현이 상당히 많다. 그래서 영어수업 시간에 수통태, 능동태 문장을 바꾸느라고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다. 동시에 코뱅이들이 쉬운 말을 까탈스럽게 수동, 피동으로 말하는 것이 싫었다. 서구인들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한계를 의식해서 수동적인 표현이 많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와 달리 수동태가 적은 우리말은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인본주의적 사고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우리의 역사가 외세에 굴하지 않고 완강히 버텨온 것도 우리의 주체적인 의지가 강해서일 것 같다. 우리는 유달리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다. 그 능동적인 자존감이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버텨내는 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거리에서 성조기를 흔드는 태극기부대는 '미국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대주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본래 우리의 기질대로 가급적 능동적, 적극적 표현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좋은 날 가지라’라고 한다면 영어식 그대로라서 자존심 상할 일이고, ‘좋은 날 만들라’라고 하면 억지일 것이니, ‘좋은 날 보내라’ 정도라면 어떨까 싶다. ‘보내다’는 본인의 의지가 드러난 말이다. 글자 한 자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요행이나 신의 도움을 바라는 태도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날을 보내려면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가 필요하다. ‘되라’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자의 도움이 필요한 의존적 태도이다. 비록 습관적으로 하는 인사말이기는 하지만 언어는 사람을 지배하는 속성이 있다면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언어를 만들었지만 언어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인간이 AI를 만들고 그 지배를 받고, 인조인간을 만들고 또한 그 지배를 받을 것처럼-


명절 때 하는 말 중에서 ‘행복한 명절 되세요,’도 마찬가지이다. ‘되세요’라는 피동에는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행복한 명절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으로 들린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 ‘기쁜 생일 되세요.’ 이런 말도 자주 하는데 마찬가지로 본인이 의지가 드러나게 ‘보내세요’ ‘만드세요’가 좋을 듯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도 역시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 없이 하늘의 도움이나 운에 의지하는 기복적인 태도로 들린다. 이왕이면 ‘새해 복 많이 베푸세요, -지으세요, -만드세요’라고 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말을 해서 능동적인 인간을 만들 수 있다면 그처럼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좀 어색하겠지만 어차피 언어는 반복해서 다수의 언중이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굳어지는 것이다.


성탄절에 ‘축 성탄’ ‘메리크리스마스’는 물론이고, ‘즐거운 성탄되세요’도 자연스럽게 들린다. 기독교는 신의 가호가 절대적이므로 수동형이 표현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의 노력으로 운명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신에게 도전하는 무모한 객기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기독교에서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사람의 도리를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이라는 자세를 틀렸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Do Your best’를 당연한 말로 여기는 것처럼 어느 경우이든 사람의 도리를 먼저 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언어는 축복, 선언, 의지, 저주, 금기 등의 주술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언어가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이왕이면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언어를 구사했으면 좋겠다. 아울러 요즈음 젊은이들 말투 중에서 걸핏하면 ‘–같아요’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다. 분명하고 당연한 일도 ‘-같아요’를 습관적으로 연발한다. 혹시라도 젊은이들의 신념과 의지가 부족해서 나타난 현상이라면 가벼운 유행어로 흘려버릴 일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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