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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Jul 27. 2023

책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읽는 것


어머니가 책을 읽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머니에 대해선 농담을 하기 힘든데 그건 아버지 덕분에 어머니가 집의 모든 걸 떠안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된 그녀가 책을 읽지 않는 건 당연하다. 책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읽는 것이다. 어머니는 말했다.

정지돈 저, <영화와 시> 중에서



 저는 올해 여름을 한국 친정집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조금 큰 수술을 받았고, 적어도 한 달 동안은 장거리 비행을 하면 안 된다고 해서 한국에 머물며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는 중이에요. 일본이나 동남아처럼 저공비행을 하는 가까운 거리의 국가로는 2주 만에 출국도 가능하다고 하는데, 북미나 유럽처럼 장시간 고공비행을 하는 비행기를 타는 건 기압차이 때문에 조금 위험하다고 해요. 어쩔 수 없이 한 달 이상을 한국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친정어머니가 고생 중이에요. 갑자기 늘어난 식구들의 끼니를 챙겨주고, 저희가 지내는 공간을 함께 청소하고, 우당탕탕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삼 남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고요. 저에게 주어진 마로서의 역할은 때때로 버겁고 힘들었는데, 반대로 제가 받는 엄마의 돌봄은 왜 이렇게 달콤한지요. 덕분에 저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올해 여름에는 원하는 만큼 책을 실컷 읽으며 보내고 있어요. 일단 폴란드에 있을 때보다 한국어 책을 구하기가 쉬워서 행복하네요. 요즘 저는 매일 서점이나 도서관에 갑니다. 오늘은 코엑스에 있는 별마당도서관에 다녀왔고요, 어제는 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도서관에 다녀왔어요. 그저께는 롯데월드몰에 있는 아크 앤 북 서점에 다녀오고, 그 전날에는 교보문고에 다녀왔습니다. 그 밖에도 중고서점과 작은 마을 도서관, 책박물관과 동네서점을 오가며 그동안 폴란드에서 살면서 늘 품어왔던 '모국어책'에 대한 아쉬움과 갈증을 해소하고 있어요. 오늘의 문장을 발췌한 정지돈 작가의 <영화와 시>도 생각해 보니 친정집 앞 작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네요.


책 덕후인 저를 행복하게 하는 장소는, 역시 책이 있는 공간인 것 같아요


 정작 한국에 사는 동안에는 이렇게 자주 책 공간에 들르지 못했던 것 같아요. 폴란드로 이사 가기 전 첫째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 둘째와 셋째는 각각 만 3살, 1살 아기였습니다. 점심시간만 끝나면 바로 아이들 하교, 하원 시간이라 아차, 하는 순간에 바로 자유시간이 끝나버렸어요. 오전의 그 짧은 자유시간은 저를 위한 혼자만의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다섯 식구가 먹을 음식을 사러 거의 매일 장을 보러 가야 했고, 가족을 대표하여 은행을 가거나 관공서를 가야 하는 일도 심심찮게 생겼고, 학교나 유치원에 학부모 참여행사도 있었고, 무엇이든 입에 넣는 아기 때문에 구석구석 쌓인 먼지와 작은 장난감들을 정리해야 했으니까요. 그 당시에도 저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건 읽고 싶은 책을 들고 호젓한 분위기의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일이었지만, 오전 세 시간이라는 짧은 자유시간 동안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다 보면 그럴 여유시간을 차마 만들 수가 없었어요.


 올해 여름, 좋아하는 책 공간을 찾아다니며 모국어책의 세계에 흠뻑 빠져있을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친정어머니의 희생과 배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을 대신해 주는 누군가가 있으니 그만큼의 짬이 날 수 있었던 거예요. 만약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다면 저는 도서관에 가는 대신에 장을 보러 시장에 갔을 것이고, 책을 읽을 시간에 밥을 차렸을 거예요. 물론 '책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읽는 것'이라는 문장에 백 퍼센트 동의하진 않아요. 저는 해외에서 독박육아로 세 아이를 키우면서도 전자책을 다운받아서 짬짬이 수백 권의 책을 읽어왔고, 읽은 책에 대해 꾸준히 독서노트를 정리해 왔어요. 이러한 독서이력은 개인적으로 뿌듯하게 생각하는 성취 중 하나라서 현재의 저를 구성하는 자존감과 효능감의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따라 열심히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할 일이 정말로 넘쳐흐르도록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책을 읽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인생에는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쏟아지기도 해서, 아차, 하는 순간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의 시간이, 일상이, 인생이 지배당하기도 하니까요. 그럴 때 '책을 읽는 것'은 그야말로 호사스럽고 사치스러운 행위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활자를 읽고, 생각을 하고, 깨달음을 채워 넣는 건 내 마음과 정신에 그럴 수 있을 만큼 빈 공간이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옆자리에는 친정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소설책을 읽고 계세요. 그런 모습을 보며 저는 조금 안심합니다. 갑작스레 늘어버린 대식구 생활에 어머니도 적잖이 힘드실 테고 스트레스가 쌓였을 테지만, 그래도 책을 읽을 여유는 아직 가지고 계신 듯해서요. 아니면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책을 읽어서 해소하는 성정은 모녀간의 유전이었을까요.


 책을 읽는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행복합니다. 제 아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도 뿌듯하지만, 그 반대의 방향에서도 비슷한 결의 긍정적인 마음이 일어요. 어머니가 책을 읽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던 정지돈 작가의 문장은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처럼, 책을 사랑하는 사람은 재미있는 책을 읽었을 때 이 책을 좋아해 줄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거든요. 언젠가 제가 아름다운 책을 읽고 함께 나누고 싶은 얼굴을 떠올렸을 때, 부디 그분이 책을 읽을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을 가지고 있길 바랍니다. 비록 할 일이 넘쳐흐르는 바쁜 일상 속이라 할지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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