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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Nov 19. 2023

2023년 11월 19일, ŻABKA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폴란드를 대표하는 현대 작가 중 한 명인 올가 토카르추크 Olga Tokarczuk의 소설,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2020, 최성은 번역, 문학동네)>에는 폴란드에 살아본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장면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자면 "겨울은 11월 초, '모든 성인의 날'이 지나자마자 바로 시작된다(317쪽)"라는 문장이라든지 - 슬프게도 정말로 그렇습니다. 폴란드의 겨울은 12월이 아니라 11월에 시작된답니다. 끝나는 건 아마도 4월...? - 혹은 '시비엥토페우크 시비에르시친스키'라는 말도 안 되고 발음도 안 되는 길이 -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비교적 평범한 길이 - 의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나온다든지 한다는 것들이요.


  지난달, 제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 멤버들과 함께 이 소설을 읽으며 '폴란드에 사는 사람들만 아는 개그포인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는데요, 아마 한국에 사는 독자들은 모를 듯한 '개구리'가 등장해서 저 나름대로 개구리가 무엇인지 열심히 설명해 드리기도 했었어요. 문제의 개구리가 등장하는 소설 속 장면을 그대로 가져와 보았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가 가볍게 떨리는 낮은 바리톤으로 말했다. "소에서 갓 짠 우유를 좀 사고 싶은데요."
"소라고요?" 나는 놀라서 말했다. "소에서 짠 우유는 없어요. '개구리'에서 가져온 우유면 될까요?" 남자는 실망한 기색이었다.
"빵은 직접 구우시나요?"
"아뇨. 언덕 아래에 있는 가게에서 사다 먹는데요."
"아하 네, 잘 알겠습니다.

-<죽은 자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219쪽


 이 장면은 깊은 산골마을에 사는 두셰이코 할머니에 대한 외지인의 편견(시골에 사는 할머니는 우유도 소에게서 짜서 먹고, 빵도 직접 구워 먹을 것이라는 생각)을 비꼬는 부분인데요, 소에서 짠 우유는 없고 개구리에서 가져온 우유는 있다고 대답하죠. 남자는 실망합니다. 개구리에서 가져온 우유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거든요. 사실, 폴란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개구리에서 유유를 가져올 수 있죠. 그리고 오늘 아침, 저도 개구리에서 우유 두 통을 가져온 것을 기념하며 오랜만에 장바구니 일기를 씁니다. 이 알아들을 수 없는 미스터리한 대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친절하게도 소설에는 역자의 주석이 붙어있어요.


"'개구리'는 폴란드에서 유명한 식료품 체인점의 이름이다."


지금은 브랜드로고가 바뀌어서 개구리 그림이 사라졌지만, 제가 처음 폴란드에 왔을 때만 해도(...라떼는?) 개구리 그림이 있었어요. 


 네. 그렇습니다. 개구리 - 폴란드어로는 자브카 ZABKA라고 합니다 - 는 한국으로 치면 씨유 CU 나 GS25 같은 편의점의 이름입니다. 일요일인 오늘, 일반 식료품점은 모두 문을 닫았는데요, (폴란드는 일 년의 다섯 번 정도 특별한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매주 일요일마다 모든 마트와 백화점이 문을 닫습니다.) 토요일인 어제 장을 봐 놓지 않아서 집에 우유랑 계란이 똑 떨어졌지 뭐예요. 11월부터 겨울이 시작되고, 특히 어제 첫눈이 내려 코코아와 라테 소비량이 늘어나다 보니 주중에 두 통이나 사놨던 우유가 이틀 만에 동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럴 땐 자브카에 가야죠. 폴란드에는 아쉽게도 한국과 같은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은 없습니다. 자브카는 오전 10시에 열어 오후 10시에 문을 닫는 인간적인 영업시간을 고수하고 있지만, 일요일에 당장 생필품이 필요할 때 이런 편의점의 존재는 소중합니다. 특히 크리스마스 연휴나 부활절 연휴 같은 긴 연휴 동안에는 내내 마트가 문을 닫아서 정말 곤란할 때가 많은데요, 집 앞에 걸어서 5분 거리에 자브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 지 모릅니다.



 일반 마트보다 취급하는 상품의 가짓수도, 품질도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의 신선식품을 팔고 있습니다. 과자나 일반 음료(특히 맥주) 코너는 매장의 크기에 따라 꽤 훌륭한 곳도 많아요. 관광지에 있는 자브카에서는 가끔 지역특산품을 팔기도 하는데요, 여행객들이 휴일에 많이 몰리는 스키타운이나 유명 관광지의 경우에는 일요일에 여는 식료품점이 자브카 밖에 없으니 문 바깥에까지 길게 줄이 늘어서있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자브카에서 다음과 같은 물건들을 샀어요.


[오늘의 구매 목록]

무알콜맥주 Piwo Miłosław 0%  2캔  9.98 즈워티

우유  mleko laciate 1L  2통  9.40 즈워티

크래커 opust leibniz   4.50 즈워티

초코크래커 opust ciasto leibniz mini  4.50 즈워티

멀티비타민 주스 sok tymbark multiwitamina x3  6.60 즈워티

감자 ziemniaki 1.5kg  7.99 즈워티

계란 jaja 10 szt  11.50 즈워티

총 54.27 즈워티 / 17,512원 (1 즈워티 당 322원 기준)



 원래는 '우유, 감자, 계란' 이렇게 세 개만 구매목록으로 생각하고 갔는데, 막상 자브카에 가서는 주섬주섬 다른 것들도 담아 오고 말았네요. 월요일에 등교하는 아이들 간식거리를 생각하다 보니 '쉽게 쉽게 가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과자와 주스를 샀습니다. 어렵게 가는 날에는 아침에 붕어빵을 굽거나 김밥을 만들기도 하는데, 요즘 날이 어두워서 그런지 아침에 자꾸 늦잠을 자고 싶어 지더라고요?


 그리고 무알콜 맥주! Żywiec (지비에츠)와 더불어 제가 제일 좋아하는 Miłosław (미워스와프) 맥주가 보이길래 냉큼 집어왔어요. 까르푸에서 이 브랜드의 0.5l짜리 맥주를 종종 사 먹곤 했는데 자브카에서 파는 같은 맥주는 용량도 적어 부담이 없고 가격도 저렴했습니다. 맥주 옆구리를 보니 tylko w żabka(자브카에서만 팔아요!)라고 적혀있네요. 무알콜인데 IPA 맥주입니다. 향긋해요. 폴란드에는 유알콜 맥주보다 더(!) 맛있는 무알콜 맥주들이 정말 많습니다. 혹시 폴란드에 오실 일이 있거든 꼭 사드셔 보세요.




덧.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을 읽다가 자브카를 '개구리'라고 번역한 부분이 재미있어서 큰애에게 보여줬는데요, 소설을 읽은 아이가 이렇게 얘기하더라고요.


"폴란드에는 개구리만 있는 게 아니라 무당벌레도 있잖아." 


 네, 그렇습니다. 폴란드의 가장 대중적인 마트 브랜드의 이름은 무당벌레(Biedronka, 비에드론카)입니다. 다음번 장바구니 일기는 무당벌레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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