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모임 5주 차의 멘털 바사삭 후유증이 남아 있는 채로 6주 차가 시작되었습니다. 정신머리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는, 나사가 하나쯤 빠진 듯한 일상이 계속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6주 차에 배달한 시에는 유난히 오타가 많았습니다. 보통은 배달할 시를 구글드라이브에 옮겨 적을 때 한 번, 그리고 카카오톡으로 시를 배달하기 전에 또 한 번, 그렇게 두 번 오탈자가 있는지 점검하는데요, 두 번째 점검 과정이 생략되었더니 아주 난리가 나버렸어요. 게다가 일부 글자가 아예 빠지거나 하는 탈자의 경우는 대부분 초기 단계에서 걸러지지만 미묘하게 말이 되는 단어로 오자가 생긴 경우에는 눈치채기 어렵더라고요.
필사 모임 운영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완벽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늘 항상 모임을 시작할 때면 "오타를 줄이자!"라는 각오로 시작하는데, 그 각오가 부끄럽고 무색하게도 참 여러 번 오타투성이 시를 배달한 한 주였습니다. (시벗님들, 미안해요.) 그런데 그 오타 덕분에 새로운 관점으로 시를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생기기도 했어요. 오늘의 글 제목 '오타로 빚은 시'인 이유는 그래서 입니다.
시필사 26일 차. 9. 11. (월) 김경인, '외출' - 시집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중에서
[외출]
물고기 꿈을 그만두기로 했다 꿈 밖으로 흘러나오는 비린내 때문에
꼬리 대신 골몰할 무엇이 필요해 눈동자가 나를 잠시 잊은 동안
함 속에 나뒹구는 모조 보석처럼 언뜻 보면 그럴듯하게 반짝이는 감정들을 다 두고
나는 가까운 마을을 다 돌아다녔다 고독한 돌멩이들이 굴러 먼 곳에 도착할 때까지
왜 하필 시집 제목도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일까요. 일부러 틀린 건 아닌데, 실수로 오타를 내서 배달한 시입니다. 마지막 연의 '나는 가까운 마을을 다 돌아다녔다'를 '나는 가까운 마음을 다 돌아다녔다'라고 잘못 적어 배달했어요. 잠시 후, 띵동, 오타 제보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저희 모임에는 '오타제보왕'님이 계십니다. (링크를 클릭하면 오타제보왕 님의 브런치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거의 항상 일등으로 필사 사진을 올려주시고, 바쁘신 와중에도 부지런히 단상을 올려주시는 개근 멤버이기도 하지요. 멤버들 중 가장 먼저 시를 필사하시는 데다가 눈도 밝으셔서 '어? 이상한데?' 싶은 부분을 빠르게 캐치하시고 오타를 제보해 주십니다. 혹시 운영자인 제가 부끄러울까 봐 스리슬쩍 개인 메시지로 오타를 알려주시는 다정함도 탑재하셨어요. (그래서 별명이 다정한 철학자인가 봅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오타제보왕님께서 빠르게 오타를 제보해 주신 덕분에 아무도 틀리게 시를 적지 않았지만, 가끔 제가 오타 때문에 누군가의 필사 노트에 수정테이프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참 미안해져요.
그런데 저는 왜 '마을'을 '마음'으로 오타를 냈을까요...? 꿈보다 해몽 격으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마 저는 제 마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싶은 숨은 욕망이 있었나 봐요. (프로이트는 인간의 행동은 무의식이 결정한다고 했죠. 저도 모르는 새에 무의식이 조종한 제 손가락이 저의 숨은 욕망을 적은 걸까요.) 마음속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 흩어진 조각난 꿈, 미련이 잔뜩 남은, 남몰래 꾸는 꿈의 조각들을 모아다가 나만의 보석함에 잘 담아두고 싶습니다. "물고기 꿈을 그만두기로 했다."라는 첫 구절을 읽을 때 가슴이 욱신거리듯이 아팠거든요.
"함 속에 나뒹구는 모조 보석처럼" 그 보석함에 있는 것을 누군가는 모조 보석이라고 부를지도 몰라요. 언뜻 보면 그럴듯하게 반짝이지만, 네 처지를 생각하라고. 네 나이를 생각하라고. 네 주제를 알라고 누군가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모조보석이라도, 큐빅 조각이라도 제가 다이아몬드라고 믿으면 다이아몬드의 의미를 갖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반대로, 다이아몬드도 내가 큐빅이라고 생각하면 큐빅이 되는 것일 수도 있고요. 인터넷 신문에서 읽었던 기사인데, 모두가 큐빅이라고 믿었지만 사실은 다이아몬드인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내 보석함에 있는 게 그럴싸하게 반짝이는 모조보석이 아니라 정말 보석이었으면... 근데 내가 그걸 모르고 돌멩이 취급만 해준 거였으면 어쩌죠?
가까운 마음도, 가까운 마을도 다 돌아다니며, 가짜 보석 취급받는 저의 천덕꾸러기 돌멩이들을, 저의 꿈의 조각들을 모아보고 싶어요.
시필사 27일 차. 9. 12. (화) 진은영, '청혼' -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중에서
[청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오타로 빚은 시'와 유쾌하고 너그러운 시벗들
그렇게 마음도, 마을도 돌아다니며 오타를 낸 바로 다음 날, 두 번째 오타가 도착하고 말았습니다. 별들은 귓속의 벌들처럼 웅성거려야 하는데,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린다고 배달해 버렸지 뭐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오타를 꽤 늦게 발견해 버린 덕분에 저도, 멤버들 몇 분들도 벌을 별이라고 이미 필사해 버린 후였습니다. 저의 필사 노트는 오늘의 증거자료로 제출하기 위해 따로 수정하지 않았지만, 다른 분들의 필사 노트에선 '별'을 '벌'로 수정하기 위해 'ㅓ'모음이 유난히 두꺼워진 장면들을 포착할 수 있었어요. 그러나 이런 해프닝에도 유쾌하게 이해해 주고 넘어가주는 멤버들. 미안하고 사랑합니다.
부끄러운 마음을 담아, 저는 다음과 같은 단상을 남겼습니다 : 언젠가 '마음을 돌아다녔다'는 문장이 들어간 시와, '별들이 웅웅 거리다'라는 문장이 들어간 시를 쓰고 싶네요. 시집 제목은 <오타로 빚은 시....>. 아마도 '시적 허용'이 넘쳐나는 시집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물론 조금 진지한 단상도 덧붙여 보았어요 : '오래된 거리처럼 사랑한다는 건 어떤 사랑일까' 고민해 보았습니다. 건물의 색이 바래고, 나무는 오래되어 우거지고, 길가엔 여기저기 패인자국과 누군가의 낙서도 남아있을 것 같은 거리. 어린 시절 친구들과 드나들었던 떡볶이가게는 늘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매일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어느새 희끗해진 가게 아주머니의 흰머리카락이 새삼스러우면서도 새삼스럽지 않은... 그리고 거기에 참새방앗간 같은 북카페나 독립서점이 하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네요.
그 거리를 지나다니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니까, 때때로 오래된 거리는 나의 바람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겠지만, 내가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기울인 만큼 나에게 소소한 감동과 행복을 주는 공간이 될 거예요. 내 옆지기를 오래된 거리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아마 우리는 그러고 싶어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서, 평생 동안 사랑하고 싶어서 '청혼'했겠지요?
이틀 연속 오타 행진을 했더니, 그 뒤로는 정신 바짝 차려서 한 동안은 오타가 없었습니다. 하나도 없었어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사실 최근에 용혜원 시인님의 시를 배달하면서 오타를 하나 냈었네요. 시 필사 모임은 어느새 마지막 한 달을 앞두고 있는데요, 12월의 모임 운영 목표도 여전히 "오타를 줄이자!"입니다. 부디 성공을 빌어주세요!
6주 차에 배달했던 짧은 시 한 편 더 공유하면서 오늘의 글을 마칠까 합니다. 도종환 시인님의 <한 송이 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피어 계신가요?
시필사 29일 차. 9. 14. (목) 도종환, '한 송이 꽃' - 시집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시선 333)>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