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아이를 지켜낼 것인가
한국에 돌아온 지 어느덧 1년이 다 되어갑니다. 귀국과 동시에 다섯 식구 모두의 일상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이어졌지만, 그중에서도 첫째 아이에게 일어났던 가장 큰 변화는 드디어 스마트폰을 갖게 된 일이었어요.
사실 폴란드에 살던 시절에도 아이에게 디지털 기기는 늘 곁에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개인 학습용으로 지급한 애플 노트북이 있었고, 집에 남아 돌아다니는 공기계에 폴란드 통신사의 USIM 칩을 꽂아 비상 연락용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스마트폰은 늘 방 한구석에서 충전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어요. 아이는 스마트폰을 '소지'했지만 '사용'하지는 않았고 그것은 마치 전화기의 탈을 쓴 벽돌 같았습니다. 학교에서 미들스쿨 종강 파티가 있거나 친구네 집에 놀러 갈 때처럼 외부에서 연락할 일이 있을 때만 아주 가끔만 충전해서 들고나갔고, 그마저도 종종 꺼져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등하교 길에는 아예 휴대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SNS에 접속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카카오톡이나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소셜미디어 계정이 아예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달라져야만 했고, 달라질 수밖에 없었어요. 공교육 시스템의 구조 자체가 디지털 기반으로 얽혀 있었습니다. 중학교 담임 선생님은 카카오톡 학급 단체방을 만들어 공지사항을 전달했고, 성당 주일학교도, 합창부 동아리활동도, 학원 선생님들도 모두 같은 방식이었어요. 가정통신문이나 교내 대회 참가 안내공지도 모두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서 이루어졌고, 학교에 있는 모든 벽보들은 '자세한 안내사항은 큐알코드로'라며 스마트폰 없이는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아이가 이역만리 떨어진 한국에서도 폴란드 친구들과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이 필요했어요. 그렇게 더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는 시점에서, 첫째 아이는 중학교 1학년 여름부터 본격적인 스마트폰 사용자가 되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새롭게 통신사에 가입하고 스마트폰의 세팅을 마쳐 아이에게 기기를 쥐여주는 순간, 제 안에서는 묘한 경계심이 피어올랐습니다.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까.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개인정보와 사생활 노출 이슈는 없을까. 방어력이 없어서 너무 깊게 빠져들면 어떡하지?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도 제가 스마트기기를 사 주지 않자 '그래도 조금씩 디지털 기기를 접하게 해서 욕구를 해소시켜줘야 한다'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너무 통제만 하기보다는 어릴 때부터 조금씩 노출시켜야 지나친 탐닉을 막을 수 있다는 것, 기기의 유혹을 아예 몰랐던 아이가 한 번 맛을 보면 걷잡을 수 없을 거라는 걱정들이었어요.
저는 그 이야기를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일견 일리 있는 조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고개를 드는 어떤 반발심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정말로 스마트폰 없이 자란 아이는 자기 통제력을 기르는 데 실패하게 되는 걸까?', '아이는 유혹에 무력한 존재일까?' 하는 물음들. 그리고 과연 이 중독성이 미리 조금씩 노출시키면 예방이 되는 종류인가 하는 문제들. 휴대성이 떨어지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와 달리, 스마트폰의 중독성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손에 쥘 수 있고, 짧고 강력한 자극을 끊임없이 제공하기 때문에 사용자가 의식하지 못한 채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스마트폰 없이 자라는 경험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세상과 연결되기보다 자신과 연결되는 시간을, 화면보다 자연과 책 속에 몰입하는 일상을 가급적 최대한 길게 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당연하게도, 저도 백 퍼센트 확신은 없었고 내심 불안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정말 아이가 중독적으로 스마트폰에 빠져들지는 않을까. 스마트폰의 알림 소리에 무기력하게 휘둘리지는 않을까. 그 우려는 작년 여름, 아이의 스마트폰을 개통해 준 이후 한동안 마음 한편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아이의 스마트폰 사용 기록을 들여다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아이는 여전히 하루 평균 30분 내외의 시간을 스마트폰에 할애할 뿐이에요. '전화기의 탈을 쓴 벽돌' 수준에서는 조금 사용량이 늘어났지만 그것도 대부분은 친구들과 주고받는 카카오톡 메시지나 선생님들의 공지 확인, 학교 알리미 앱, 사진첩 정도가 전부입니다. 하루 평균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6시간을 훌쩍 넘는 제 모습과 비교해 볼 때, 저는 아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사부님'하며 한 수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사부님, 대체 비법이 뭔가요...? 저도 하루에 스마트폰을 딱 30분만 쓰며 살고 싶어요...!
물론 아이의 핸드폰에는 몇몇 자녀보호 기능이 걸려있습니다. (제가 종종 아이의 사용기록 통계를 조회해 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은 부모 동의 없이는 설치할 수 없고, 유튜브와 같은 중독성이 강한 앱에는 사용 시간제한이 걸려 있어요. 밤 11시가 되면 기기는 야간 모드로 전환되고, 아이는 거실에서만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습니다. 아이는 단 한 번도 스마트폰을 품에 안고 방에서 잠든 적이 없어요.
다행인 건, 아이가 이런 약속과 규칙들을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이는 그 규칙들이 스스로에게도 타당하다고 느끼는 듯해요. 학급 친구들이 '야, 그거 자녀보호 기능 뚫을 수 있어. 내가 우회해 줄게.'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자기가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스마트폰을 늦게 쥐여준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어요. 수련회 기간 동안 학교 제출용 공폰을 따로 챙겨 오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아이는 집에 남는 기계가 있음에도 손대지 않고 조용히 자기 기준을 지켰습니다. 강요가 아닌 합의로 쌓인 신뢰의 결과이고, 아이는 그런 자신의 선택과 조절력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합니다. 제 아이지만 그 절제력 앞에서 저는 종종 부끄러워집니다. 이 정도면 오히려 내가 아이에게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저도 몇몇 사용시간 제한을 제 핸드폰에 걸어두었습니다. (엄마보호 기능입니다...)
3주 전, 아이가 열네 번째 생일을 맞았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아이가 씩 웃으며 저에게 말하더군요.
"엄마, 나 이제 엄마 인증 없이 웹사이트 가입할 수 있다?!"
만 14세 미만 이용자 법정 대리인 동의서. 그러나 더 이상 아이는 만 14세 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내려앉았어요. 법적으로, 기술적으로 이 아이는 이제 디지털 세계에서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만 14세. 온라인 세계 속의 아이를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시기는 이제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모든 웹사이트에서 '부모 동의' 절차가 사라지고, 아이는 자기 자신의 의지만으로 세상과 얼마든지 연결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감보다 더 큰 감정이 밀려왔어요. 씩 웃으며 저를 쳐다보는 그 자신만만한 미소에서, 그리고 당당함에서. 그건 안도감이었습니다. '그래도 얘는 잘 해낼 거야.'라는 믿음이었고요.
저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습니다. 특히 행동수정연구실에서 임상심리 석사 과정을 밟았는데 자극과 반응, 행동과 보상의 연결에 대한 이론들을 책과 논문으로 익히고 실습으로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일은 교과서에서만 배우는 것이 아니었어요. 아이의 기질, 성향, 발달 단계에 따라 그 이론은 끝없이 조정되고 유연해져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부모 자신이 먼저 끊임없이 배우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디지털 시대에 아이를 키운다는 건, 단지 화면 사용 시간을 관리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아이들은 언젠가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일상을 설계해야만 하는 시기를 마주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청소년기 아이가 속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들을 통제하는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감시의 눈길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감시의 유무'가 아니라 아이 스스로 어떤 기준과 태도로 디지털 세계를 대할 수 있느냐겠죠. 더 본질적인 것은 기계와의 거리를 어떻게 조절하느냐보다 '자기 자신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느냐'라고 생각해요. 누군가가 보지 않을 때에도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힘. 그것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 꼭 필요한 내면의 자율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이를 제 나름대로 열심히 키웠고,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오늘을 준비시켜 왔습니다. 책을 읽는 힘, 집중력을 기르는 습관, 자신을 조절하고 이해하는 태도 - 그 모든 것이 이제 아이의 내부 자산이 되어주리라 믿어요.
그리고 이 브런치북은 그런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디지털의 홍수 속에서도 아이의 마음을 건강하게 지켜내고 싶은 부모들에게, 혹은 이미 그 물살에 휩쓸리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았습니다.
요즘 아이의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제게 종종 이런 질문을 던지는 분들이 계세요. “어떻게 하면 아이를 그렇게 키울 수 있어요?” 특히 제가 터울이 지는 세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아직 초등학생을 키우는 둘째나 셋째의 친구 엄마들이 많이 물어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도 모를 한 문장을 꺼냅니다. “아이를 책 많이 읽는 아이로 키워야 해요.”
그 말을 꺼내고 나면 잠시 정적이 흐릅니다. 너무 단순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그게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아서 그런 걸까요. 허무하게 들리기도 하고, 요즘 같은 시대에 현실감 없는 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제가 이 말을 반복해서 전하게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단순한 대답 안에 제가 믿어온 것들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민감한 개인정보가 들어가 있어 허락도 받을 겸 이 글의 초고를 첫째 아이에게 보여주었더니 아이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엄마는 역시 기승전'책'이야.")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만든 편리함과 즉각성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얼마나 빠르게 정보의 소비자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목격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기보다 반응하고, 사유하기보다 넘기며, 문장을 따라가며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일보다 짧고 강한 자극에 익숙해지는 아이들. 그리고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는 공감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디지털 시대일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이 '읽는 인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요.
아이가 읽는 책 안에는 디지털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는 작지만 단단한 등불이 하나씩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줄거리가 아니라 문장을 따라 사유하며 자기 내면을 만나는 경험입니다. 정보를 소비하는 뇌가 아니라 의미를 찾아가는 뇌를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읽는다는 것은 단지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세상과 자신을 이어 보는 훈련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삶의 복잡함을 감당할 언어를 익히고, 무엇보다 혼란스러운 현실을 마주할 때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유일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믿어요. 문장을 따라 사유하는 아이, 문장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길어 올리는 아이, 문장 하나를 오래 품고 자기만의 언어로 다시 써보는 아이. 그런 아이가 결국, 디지털 시대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요.
이 책은 그런 아이를 키우고자 애쓰는, 혹은 그런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모든 부모와 어른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아이의 '책 읽는 뇌'를 지켜주는 이야기. 지금부터 시작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