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말 없는 디자인이 멋진 디자인이라고 생각했었다.
언제부턴가 말 없는 디자인이 곧 멋진 디자인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면 정말 멋지고 잘 디자인된 좋은 디자인들은 언제나 말이 필요 없을 만큼 멋졌기 때문에.
구구절절 내 디자인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할 필요가 없다. 좋은 디자인은 말이 없다. 하지만 말 없는 디자인이 곧 좋은 디자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 부족한 모습을 감추기에 말 없는 디자인은 도움이 된다. 나조차도 내 부족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뭐 어쨌든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것을 보여주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침묵의 뒤에 숨겨진 멋진 무언가가 더 있다는 식으로 내 디자인을 포장하는 거다.
'괜찮아. 말없이 하다 보면 진짜 실력도 늘어서 괜찮아질 거야.' 그런데 말없이 실력만 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내 디자인은 언제나 '그럴 듯'한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처음엔 그것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적당히 해도 그럴듯한 디자인 정도는 할 수 있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1년, 2년이 지나고, 나는 그럴듯한 내 디자인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렇게 디자이너가 되면 평생 적당히 부끄럽지만 않게, 그럴듯한 디자인만 하다가 끝나는 건가? 왜 그럴듯한 것 이상의 수준에 오를 수 없는 거지? 나는 왜 여전히 자랑스러운 작업 하나 없지? 한때는 '내가 맡은 프로젝트가 누구나 들어도 알만한 프로젝트라면 자랑스러운 작업이 되겠구나'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래서 이름 있는 것들의 뒤를 쫓아보기도 했다. 물론 나의 한정된 경험이었지만, 그곳에서 내가 본 것은 껍데기만 남은 이름이었다. 속이 텅 빈 그것으로부터 나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고 내 그럴듯한 디자인에 만족할 순 없었다. 그럴듯한 디자인은 누구나 할 수 있었기에.
자신만의 디자인 언어를 다듬고 재련하여 자신의 디자인을 일정 경지 이상의 반열에 올려놓는 디자이너들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디자이너들을 보면 경외심이 든다. 그들은 이성보단, 본성에 가까운 '감각'이나 '본능'으로 디자인한다. 그 감각과 본능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파고들어 누구도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쟁취하고 돌아오는 탐험가의 모습과 같다.
이들은 누구도 닿지 못하는 깊은 지점에서 디자인을 하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어릴 적 이 분들을 보고 아, 내가 가야 할 길이 바로 이곳이구나 라고 생각했던 걸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것이 내가 가장 못하는 부분이다. 나는 매력적인 디자인보다는 친절한 디자인을 더 좋아하고 잘하는 것 같다.
친절한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말 없는 디자인을 해선 안된다. 다행히 내가 친절한 디자인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후로 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말 많은 디자인들이 하나둘씩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것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보니, 내가 가야 할 길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저 그런 디자인에서 벗아날 수 있는 길.
그 무렵 읽었던 후카사와 나오토와 재스퍼 모리슨의 책 'super normal'에서 모리슨은 말했다. "디자인 세계에서는 담론이 부족한 것 같고, 우리 모두가 일종의 시끄러운 고요 속에서 묵묵히 작업했잖아요. 그래서 어떤 것은 말로 이야기를 해야겠더라고요."시끄러운 고요. 참으로 맞는 말이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시끄럽고 문제 투성이인 것들과 영원히 발맞춰 나아가야 할 숙명인데, 어찌 고요하기만 할 수 있겠는가.
코로나로 인해 선 후배 간의 교류가 전혀 없어졌지만, 후배 디자이너님들을 만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두 가지 방향 중에서 내가 어느 쪽에 더 흥미가 있고, 가치를 두는지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이를 조금 더 빨리 알았다면 방황하는 시간이 조금은 줄었으리라.
"나는 디자이너이고 작가나 평론가는 아니지만, 업무의 일환으로 디자인 영역에서 얻은 사고의 산물을 사회에 환원해 보고 싶다. 언어는 본래 문예가의 것도 아니고 비평가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떤 전문성에 깊이 들어가야 획득할 수 있는 경험이나 인식이야말로 언어로 치환되어 날리 유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수학자나 생물학자나 어부나 디자이너나 다 마찬가지다. 전공으로 하는 나무의 우듬지까지 올라가 그곳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언어를 이용하여 그 풍경을 세계에 전해야 한다. 더 나아가 디자이너는 자신의 활동 배경에 있는 사색과 감수성에 대하여 더 많이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디자인이란 사람이 살아가면서 환경을 만드는 일 하나하나를 계획하고 다듬어 내는 지혜다. 그것은 경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지만 금융경제나 문화의 마찰로 삐그덕거리기 시작한 오늘날의 세계에 앞으로 요구될 합리성과 감수성을 다루는 영역이다." - 디자인의 디자인, 하라 켄야 -
나는 말 많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말이 필요 없이 좋은 디자인을 하게 되는 날이 올 때까지, 그 이후로도 계속. 우듬지에 도달한 다음에, 멋진 말들만 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갈길이 너무 멀어 영영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한 채 디자인만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높은 곳에 도달한 다음에 남긴 멋진 말들만 있는 것보다, 결과가 어찌 됐든 그 발자취를 남기는 편이 더 좋지 않겠는가. 하라 켄야의 발자취이자 그가 신인 시절에 기고한 글들을 엮은 책 '포스터를 훔쳐라'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연재의 행복한 부작용으로 디자인에 대한 나의 생각이 부드럽게 품을 넓힐 수 있었다는 사실도 여기 밝혀 놓고 싶다. 감각적인 디자인 작업은 자칫 마음속에 예각적인 긴장감만 키워 놓기 십상인데, 언어라는 형태로 진열하고 보니 그것이 뜻밖에 부드러운 일화로 변용된다. 이 발견은 디자이너 경력에서도 의미 깊은 체험이었다고 본다."
앞으로 디자인 세계의 담론이 풍요로워지기를, 시끄러운 고요를 깨고 시끄러워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