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하는 대상과 디자인
막연했던 취업 준비 과정과 과정 중의 다양한 생각들을 공유하려 합니다.
나는 2, 3학년까지만 해도 해외 대학원 진학을 꿈꿨다. 국내가 아닌 '해외' 대학원 진학을 꿈꿨던 이유는 문화적, 사회적 배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디자인을 공부한 사람들은 디자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것들을 전개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들과 교류하며 함께 심화 과정을 밟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성장의 원동력이 되리라 생각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해외 대학원 진학이나 취업은 불가능해졌지만, 코로나를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4학년 1학기와 2학기를 겪으며, 그것이 바꾸어 놓은, 혹은 바꾸어 놓을 세상에서는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무엇이든 배우고 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해외'대학원에 대한 꿈은 수그러 들었다. 그럼에도 배움에 미련이 남아 국내 대학원을 알아보았는데,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을 배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건대, 내가 배우고 싶었던 것들 대부분이 학교가 아닌, 현장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전공 지식과 현장 경험은 모두 게을리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둘 중 한 가지만이 너무 비대해진 상태보다는 균형을 이루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많은 지식을 쌓은 것은 아니지만, 그 간의 배움과 성장을 현장에 적용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사이의 괴리가 있다면, 그 또한 경험해보고 싶었다.
막상 취업을 하려고 보니 막막했다. 어디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도 몰랐고 정보를 얻었다고 해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지도 몰랐다.
디자이너들에게 많이 알려진 곳, 관련 단체로부터 인정받은 곳, 마음이 끌리는 비주얼을 내놓는 곳, 성장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 곳 등 몇 가지 기준을 세워 보았다. 기준들을 정리해 보니 결론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을 행하고 있고, 다방면에서 성장할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은 무엇일까? 정말 운 좋게도, 이 시기에 읽던 책, 프랭크 바그너의 '디자인의 가치'를 읽다가 추구해 마땅한 기준이 불현듯 떠올랐다.
디자인의 가치에서 프랭크 바그너는 지금이 '디자인 민주화'시대라고 말한다. 디자인 민주화로 인해 디자인 프로세스, 방법론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것을 저자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전문 디자인 영역과 비전문 디자인 영역이 구분되며, 전문 디자인 영역이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문 디자인 영역은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은 무엇이고, 왜 그것이 하고 싶은가 하는 물음이었다.
디자인하려는 대상과 디자인은 유기적이고 상호 보완적이다. 나는 대상을 잘 헤아린 다음 적절한 비주얼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라 생각했는데, 더 나아가서 대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까지도 제시할 줄 아는, 혹은 반대의 경우로도 긴밀하게 협업하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확신이 섰다. 그것이 앞으로 전문 디자인 영역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개인의 이미지는 이 사람이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표현하는 단순한 투영면이 아니다. 그의 존재를 표현하는 거울이나 다름없다. 외적인 형태는 내적인 변화에 대한 소망까지 비춘다. 개성은 형태와 그 형태가 표현하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 프랭크 바그너, 디자인의 가치
이렇게 생각하니 명확한 방향성이 보였다. 디자이너가 디자인하려는 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곳은 우선순위에서 미루었다. 다만 걱정되는 점은 나는 대상을 헤아리고 디자인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비주얼 메이킹 능력이나 경험이 떨어지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를 다루며 비주얼 메이킹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곳에 들어간 다음, 이후의 스텝으로 나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고민됐다. 이때까지 과도하게 디자이너의 비주얼 메이킹적 면모가 알려지고 가르쳐지고 행해지긴 했지만, 디자이너는 어찌 됐든 최종적인 비주얼을 다루고 만드는 사람이기에, 오만한 생각과 부족한 실력으로 마음만 앞선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었다.
또 다른 중요한 기준은 디자인하는 대상이 어떤 분야에 맞닿아 있느냐 하는 범주와 그것을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가고 지켜볼 수 있는지 여부에 있었다. 나는 실제 공간에서 혹은 오감을 통해 중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험에 관련된 디자인을 했을 때 가장 성취가 크다. 그래서 브랜드를 만들고 브랜드 모든 접점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주요 업무로 하는 인하우스 브랜드 디자인 직무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경력상 자격 요건에 맞지 않았지만 내가 세운 기준에 가장 가까운 곳에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포트폴리오와 이력서를 준비해 지원했다.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에 이러한 기준들을 충족하는 회사를 접하게 된 것은 정말 큰 행운이었다. 매일 같이 디자인 구인구직 글을 찾아본 내 작은 노력도 칭찬해주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 세운 기준들이 있었기에, 감히 도전해볼 용기가 생겼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이것들은 강력한 동기가 되고 확신을 주었다.
새로운 놀이경험을 만들어가는 스타트업 <모노리스>에 3월부터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입사하여 열심히 적응 중입니다. 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주제로 찾아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따뜻한 눈길로 지켜봐 주시는 모든 분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