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고 싶은 회사'의 기준과 실제
지난 3월 국내 IT 스타트업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입사했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8개월 차가 되었다.
졸업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는 학제적 배움과 취업하여 현장으로 나가는 실천적 배움 둘 사이에서 고민했고 그동안의 짧은 학제적 배움을 현장에서 적용해보고 둘 사이의 괴리가 있다면 경험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회사에 입사했다. 실제로 학교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싶었으나, 그중에서도 어떤 이야기를 공유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 인하우스 디자이너로서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 글을 써볼까?
- IT 업계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에 대해서?
- 스타트업의 수평구조와 그에 따른 디자이너의 역할과 방향성에 대해?
- 회사에 입사하고 나면 고민하게 된다는 ‘디자인 스타일’에 대해서?
- 스페셜리스트를 바라는 시대에 어떤 방식으로 다학제성을 실현하면 좋을지?
- 혹은 디자인 업무에서 믿음과 신뢰는 어떻게 쌓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들을?
- 그것을 위해 필요한 디자이너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에 관해서?
- 졸업전시의 연장으로 시작했지만, 무산된 프로젝트 경험에 대해서 공유할까?
- 혹은 내가 회사에서 경험한 작은 성공과 실패들에 대해서 공유할까?
- 디자이너의 비즈니스 이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고민하던 찰나에 이전 글에서 다뤘던 가고 싶은 회사에 대한 기준들을 보았고 이번 글에서는 입사 전 세웠던 ‘내가 가고 싶은 회사’에 대한 기준들과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경험해본 실제를 함께 비교해보며 포괄하는 주제들을 짧게나마 다뤄보고자 한다.
내가 회사를 들어가기 전 세웠던 기준들은 아래와 같다.
-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을 행하고 있고, 다방면에서 성장할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었다. 디자인하려는 대상과 디자인은 유기적이고 상호 보완적이다. 나는 대상을 잘 헤아린 다음 적절한 비주얼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라 생각했는데, 더 나아가서 대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까지도 제시할 줄 아는, 혹은 반대의 경우로도 긴밀하게 협업하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확신이 섰다. 그것이 앞으로 전문 디자인 영역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다.
… ‘이렇게 생각하니 명확한 방향성이 보였다. 디자이너가 디자인하려는 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곳은 우선순위에서 미루었다.
‘디자이너가 알맹이와 분리되어 외형을 바꾸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대상이 탄생한 배경과 그것에 얽혀 있는 것들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바탕으로 디자인할 수 있는 환경인지’가 나의 첫 번째 기준이었다. 대상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연관된 타 영역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며 루에디 바우어는 이를 위해 영역 간 위계구조 없는 디자인과 타 학제 간의 연대가 가능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디자인과 영역 간 위계구조가 동등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디자인이 프로세스의 마지막 단계에 등장하는 구조에서는 위계구조가 완전히 동등해지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재직 중인 회사는 대체로 프로세스 초기 단계부터 디자인이 개입하고 논의되고 있어 디자인이 존중받는 동등한 환경이라고 생각했으나, 타 부서로부터 디자인 파워가 강한 것 같다는 의견을 자주 들었다. 디자인 위계구조가 높다고 인식하는 타 부서에서 농담처럼 던진 ‘그놈의 디자인 때문에...’라는 말을 '디자인 덕분에'로 바꾸는 것이 주어진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위 사례에서 디자인은 프로젝트 마지막 단계에 등장해 전체 프로젝트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 놓았다고 한다.)
지금은 내게 주어진 프로젝트에 한정된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만, 한정된 영역을 넓혀가고 싶다. 더 나아가 비즈니스 구상 단계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하고, 프로젝트를 어떤 방향으로 진행하면 좋을지 함께 논의할 수 있을 만큼의 경험과 실력을 쌓고 싶다.
디자이너들의 노력으로 디자인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자 노력하면 협조해주는 환경이 빠르게 조성되고 있다. 앞으로도 디자인 환경과 인식 개선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는 어떠한 노력들이 필요할까? 또 디자인이 타 학제를, 타 학제가 디자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할까?
-
‘또 다른 중요한 기준은 디자인하는 대상이 어떤 분야에 맞닿아 있느냐 하는 범주와
디자인 산출물을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가고 지켜볼 수 있는지 여부에 있었다.’
1번 기준은 이 2번 기준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양한 분야에 맞닿아 있으면 더 복잡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그것들을 해결해나가는 경험이 가능하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다. 디자인 속에 고립된 채 디자인만 하는 것이 큰 의미가 되지 못했던 과거의 경험도 이 기준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 다양한 분야 중에서도 어떤 분야냐 하는 기준은 아래와 같았다.
1. 새롭고 긍정적인 경험과 문화를 만들어내는 업계인가?
2.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이 내가 공감하고 지지할만한 가치인가?
(가치관에 대한 공감은 업무에 대한 확신과 믿음에 영향을 주었다.)
재직 중인 회사의 경우 새로운 놀이 문화의 창조를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나는 ‘놀이 경험의 확장’을 위한 Software 직군, 놀이의 기본인 ‘육체적 경험’을 만드는 Mechatronics 직군, 그것을 소비자들과 연결시켜주는 Marketing 직군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접점이 없던 사람들과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은 언제나 막막하고 두렵지만 그 이상의 충족감을 안겨준다.
내가 모르는 영역과 협업하기 위해서는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 같다. 해당 영역에 대한 이해와 이해하기 위한 노력들은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에 도움이 된다. 나의 경우에는 해당 영역의 실무에서 쓰이는 툴의 학습이 도움을 주었다. 반대로 타 영역에서 디자인을 이해하기 위해 디자인 툴을 공부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다.
나는 더욱더 다양한 분야와 협업하고 싶다. 새롭고 도전적인 과제에 직면해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이 필요한 어딘가에 도움이 되고 싶다.
이러한 연대는 기본적으로 서로를 존중하려는 자세가 바탕되어야 한다. 존중은 전문성에서 비롯되며, 전문성은 다양한 현장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연함, 개인적 통찰, 책임감, 그리고 끊임없는 배움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지 되짚어보며, 전문성을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지..
디자인은 시간에 견뎌야 한다는 ‘마카베 도모하루’의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 짧은 호흡으로 끝나는 업무나, 단발성 흐름에 합류하는 기획 하의 디자인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내가 속한 인하우스 디자인 R&D의 경우 대부분 장기적인 호흡과 시야로 디자인 산출물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프로젝트 단위로 업무가 진행되는 이전 디자인 스튜디오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지금은 장기적인 시각으로 디자인하는 비중이 늘었다. 인력 부족 문제나 회사에 합류하는 과정상 장기적으로 디자인을 유지하고 관리해보진 못했으나, 여력이 생기는대로 브랜드 관점에서의 경험 디자인에 더욱 신경 쓰고 싶다.
디자인은 자연도태된다. 하지만 나의 디자인이 도태되는 과정을 외부인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디자인이 도태되기 전에 유지해야 할 부분과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야 하는 부분을 잘 헤아린 다음 또 한 번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말하자면 일회용품을 버릴 때의 죄책감과 반대되는 지속 가능한 물건을 잘 관리하며 사용할 때 얻는 기쁨과 유사한 감정인 것 같다. 사회 또는 시장에 던져지기만 하고 유지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사회와 시장은 쓰레기통과 같은 형태로, 던져진 디자인은 쓰레기통 속의 휴지조각처럼 변하고 말 것이다. 이런 것들이 유지, 보수는 커녕 비워낼 겨를 없이 속수무책으로 쌓이게 된다면, 주변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공해와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시간에 견디는 디자인은 어떤 디자인일까? 마카베 도모하루는 ‘최초로 시장에 도입할 디자인(프라이머리 디자인)의 자질을 어떻게 설정하고 효과적으로 설계하느냐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첫째, 필요에 따라 기존의 디자인 스타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것
둘째, 시장의 청취 정보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을 것.
셋째, 디자인 코어를 사용자의 의견에서만 발견하려 하지 않을 것,
넷째, 마케팅 정보를 정확히 파악하고 디자인을 진행할 것.
잠재된 디자인 개발 환경에 밀착하여 마케팅 정보를 진지하게 음미하고, 길을 모색하며, 미처 깨닫지 못한 잠재력까지 발견하는 관점이 훌륭한 ‘프라이머리 디자인’을 만들어 디자인을 지속시킨다고 한다.
타쿠사토의 디자인의 경우 이 프라이머리 디자인에는 당사자 의식이 바탕되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 운동의 행방을 생각해내는 저변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디자인 리뉴얼에 대한 요구는 몇 가지 국면을 맞이하며 발생한다.
저조한 매출, 새로운 가치의 대두, 강력한 경쟁상품의 등장, 상품 콘셉트의 변화, 판매 경로의 변화, 사용자의 세대교체, 시대에 뒤떨어진 디자인 등 이유는 다양하다. ‘시간’에 대응하려면 ‘프라이머리 디자인’에 담긴 바꿔서는 안 되는 디자인의 가치 및 디자인 요소와 바꿔도 돠는 디자인 요소, 새로 추가해야 할 디자인 요소를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지속력 있는 디자인의 필요조건이다. 갱신할 때마다 전혀 다른 디자인이 등장하면 디자인의 지속력을 높일 수 없다. 이를 지탱하는 것이 디자인의 구조다.
디자인은 어떤 대상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인지적인 부분과 가깝게 맞닿아 있다.
디자인이 투영하는 대상은 시간, 세월과 함께 인지적으로 혹은 대상 그 자체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대상을 투영하는 디자인은 그 대상의 변화에 발맞추어 나아갈 필요가 있다.
세월에 견디는 디자인이 훌륭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존재로서의 디자인에서는 몇 가지 기본 테제(정립)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디자인은 변한다’는 대원칙 테제이다. 이것은 디자인의 존재가 속성으로 갖는 테제에 보였듯이 디자인은 새삼 운동성 가운데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이것은 존재로서의 디자인의 숙명이자 디자인이 맞이한 현실이다.
즉 디자인은 자기 운동을 못 하면 급속하게 시장, 사회, 시대로부터 말살되는 운명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디자인 성장이란 변화를 꾀하며 디자인으로서의 유용성을 획득하고 재생산하는 ‘지속력’이 아닐까.
- 사토 다쿠의 책 <대량 생산품의 디자인론>에서 마카베 도모하루
맺으며
제가 처한 환경에서 디자이너로서 얻고자 했던 커리어와 직접 경험한 현실 사이에 큰 괴리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대 이상의 경험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새롭게 마주하게 된 고민, 해결하지 못한 어려움도 생겼습니다. 언젠가 글로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새로운 고민 - 디자이너 개인이 아닌 팀플레이어로서 디자이너가 갖춰야 할 소양 혹은 역량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고민의 실마리 - 이전 회사에서의 경험을 살려 현재는 회사 생활에서 인풋과 아웃풋의 균형이 조화롭게 맞아가고 있습니다. 아마도 다음 글로 찾아올 때 즈음이 인풋이 아웃풋을 넘어선 시점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