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지망생이라고 한다면 한 달에 100권은 숨쉬듯이 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 또한 선입견이겠지만, 아마 많은 작가지망생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 독서량이 압도적으로 많은 건 사실이다. 나 역시 작가를 꿈꾸지만, 한 달에 100권은 절대 못 읽는다. 내 느려터진 정독법으로는 한 달에 1권이 적당한 것 같다. 조금 어려운 책이라면 이해하는 데에 2달은 걸린다. 그래도 이젠 딱히 기죽거나 조급하지 않다.
예전에는 책을 느릿느릿 읽는 내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한창 책 좀 읽을 때였던 대학생 때에도, 일주일에 한 권은 읽었음에도 독서량이 압도적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무슨 도장깨기 하듯이 책을 읽으려고 발악을 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독서에 대한 흥미를 팍 잃어버렸다. 그래서 한동안 손도 안 대고 지냈다. 늘려보려고 했던 독서량은 오히려 확 줄었고, 독서량 부족에 대한 열등감은 독서기피증으로 번졌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굳이 책을 남들보다 많이 읽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릴 필요가 있을까 싶다. 단지 작가지망생 이라서? 하지만 그건 부당하다. 작가지망생이란 세상에서 제일 생계가 급한 사람들인데, 하루종일 책만 읽고 있기는 어렵지 않은가. 물론 핑계일 수도 있다. 쉬는 시간에 틈틈이 어떻게든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정도로 책이 좋은 책벌레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그런 것치고 나는 집중력이 부족한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속독이 너무 어려운 정독파이고, 많으면 한 달에 3권 정도 읽는 게 적정한 것 같다.
그래도 책을 읽을 때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상태로 몰입해서 읽는 게 더 좋기 때문에, 내가 집중해서 읽을 정도까지만 읽으면 되지 않나 싶다. 괜히 무리했다가 독서와 더 멀어지는 예전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인생에서 제일 책을 열심히 읽었던 게 중·고등학교 때였다. 그 때만해도 생활기록부를 채울려면 어떻게든 독서기록장을 써야 했는데, 학교에서 아침자습시간에 무조건 책을 읽거나 뭔가 기록하는 활동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그 때는 책 읽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어서(스마트폰으로도 딱히 할 게 없었음) '공부보단 책'을 외치며 열심히 독서를 했다.
그리고 내가 독서에 가장 몰입할 때가 정말 필요한 책을 읽을 때였다. 글을 쓰다보면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서 전문적인 지식이나 간접 체험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책은 그것을 잘 구현해놓은 수단 중 하나다. 관심분야에 대한 독서가 자연스럽게 몰입으로 이어졌고, 후에는 꼭 필요하지 않더라도 관심분야에 대한 책은 꾸준히 찾아 읽곤 했다.
이렇듯, 책은 필요할 때 제일 잘 읽히는 것 같다. 아무리 책벌레 흉내를 내어보려고 해도, 세상에는 이미 사람들의 시선과 흥미를 끌만한 요소들이 넘쳐난다. 그런데 굳이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고 정리하는 지난한 독서의 과정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이지 않을까? 필요성은 아무리 입으로 말해봐야 소용 없는 것 같다. 본인이 직접 독서의 필요성을 몸소 겪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학생들의 문해력이 많이 떨어진다며 문제를 제기하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무작정 학생들을 탓할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재밌는 게 너무 많아서 책읽는 습관을 들일 필요성을 못느끼는 것일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땐 책을 읽을 필요성을 만들어주면 되지 않나 싶다. 미국의 시카고대학에서는 졸업요건으로 인문고전도서 100권을 거의 외우다시피 읽도록 지시하고 있듯이. 처음에는 필요해서 읽더라도, 나중에 독서에 길들게 되면 알아서 찾아 읽게 될 것이다.
요즘 내가 느끼는 독서의 필요성은 바로 '영혼의 가뭄'이다. 영혼이 거의 메말라 비틀어지기 일보직전이다. 아무리 재밌는 것을 찾아 보고 있어도, 마음 한 구석에는 뭔가 공허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무슨 분야에도 딱히 흥미가 생기지 않아서 책을 들었다 내려놓았다만 반복하다가, 예전에 제일 재밌게 읽었던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이미 읽은 책이긴 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런지 다시 읽는 재미가 있었다. 독서로 영혼을 주유하는 감각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책은 하나의 세계'라는 말이 있다. 집에서 뒹굴거리기 좋아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최고의 여행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책이다. 독서를 하는 동안은 지금과는 완전 다른 차원의 문으로 나아가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내 몸이 있는 시공간이 서서히 옅어지고 책 속에 완전 들어가 있는 느낌을 주는 독서, 흔한 경험은 아니지만 그것이 바로 내 영혼을 채우는 가장 훌륭한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책 읽는 건 그렇게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읽어도 읽어도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가는 경우도 있고, 술술 잘 읽다가 어떤 챕터에서 막히는 경우도 있다. 책의 첫장부터 끝장까지 하나도 공감이 안 가는 책도 있고, 어떤 책은 '이걸 책이라고 쓴건가?'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독서를 권하는 이유는 그런 경험 또한 독서가 주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지난번에 덮었던 책을 다시 집어든다. 어려운 책은 대체로 시간이 조금 지나고 독서 경험이 더 쌓이고 나면 자연스럽게 잘 읽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어려운 고난과 역경이 와도 시간과 경험이 어느정도 해결해주듯이, 독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지금 책이 어려우면 다른 책부터 읽으면 되고, 마음에 안 들면 읽다가 덮어도 되는 거다. 강박적인 독서 말고, 오늘도 게으르고 즐겁게 독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