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심해져 퇴사를 한 뒤로 꾸준히 병원에 다니며 약을 처방받았다. 약의 효과 때문인지 몸을 움직이는 게 점점 귀찮아졌고(약 특성상 졸리고 나른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살이 야금야금 찌기 시작했다. 퇴사한 지 1년 정도 지나자 15키로가 증가했다.
'그냥 좀 쪘네'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서 전반적인 건강상태까지 나빠졌다. 건강검진 수치도 역대 최악이었다. 인생 최대 몸무게를 달성한 내 모습은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맞는 옷도 없었고 몸이 무거웠다. 아침에 눈 뜨는 게 싫었고 하루하루 죽고 싶었다. 가뜩이나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든 시기에 진짜로 몸이 무겁기까지 하니 움직이기 더 싫어졌다. 방안에 틀어박혀서 병원에 가는 것 외에는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
다행히 마음의 병이 점차 회복되어 먹던 약을 서서히 끊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약을 먹지 않아도 되었지만, 이미 붙은 살을 빼는 게 가장 문제였다. 처음에는 거창하게 식단도 짜고 운동 계획도 짰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미 고삐 풀린 식욕은 매번 내 입을 터지게 만들었고, 몸이 무거우니 운동은 하면 할수록 관절에 부담이 가고 숨이 차서 포기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어떻게든 안할 핑계를 찾게 되었다.
동네에 헬스장이 없어서, 헬스장이 너무 비싸서, 동네 마트에 식단 재료가 없어서, 식단 도시락이 너무 비싸서, 날씨가 추워서, 날씨가 더워서, 생리가 터져서, 지금은 공복이어서, 지금은 너무 배불러서 등. 어떻게든 안할 핑계만 찾다보니 결국 작심삼일의 연속이었다. 끝내 다이어트를 실패하고 나면 극심한 좌절감이 찾아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대체 뭐 때문에 자꾸 포기하게 되는지 생각을 해봤다. 그 결과, 내가 상태에 맞지 않는 너무 거창하고 무리하게 다이어트 계획을 세워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튜브에 다이어트를 검색하면 짧은 기간에 많은 몸무게를 감량했다는 사람들이 일종의 '비결'이라고 내세우는, 다소 무리한 방법들이 소개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빠른 시간 안에 몸무게를 감량해야 할 필요도 없고, 내가 따라 하기에는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소개된 방법대로 해야 '정석'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나에게 맞는 방법을 직접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리한 다이어트 계획 말고 꾸준히 실천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했다. 먼저, 식습관을 바꿨다. 야식 먹지 않기, 식사 시간 외에 간식은 먹지 않기, 즐겨 마시던 라떼류 음료는 칼로리가 낮은 아메리카노로 바꿔서 마시기, 먹는 양을 3분의 1로 줄이기, 음식을 살 때 칼로리 구성 표를 확인하고 사기 등.
다음으로, 가벼운 홈트를 병행했다. 저질 체력인 나도 그럭저럭 따라할만한 영상들로 루틴을 짜서 하루에 30분씩 병행했다. 너무 힘들면 다음날은 강도가 더 약한 운동을 찾아서 하는 한이 있어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운동했다. 그러자 영영 빠질 것 같지 않던 살이 차츰 빠지기 시작했다. 6개월정도 하니 5키로가 빠졌고, 홈트 강도를 좀 더 올리니 6개월 뒤에 다시 5키로가 빠졌다. 그래서 지난 1년간 총 10키로를 감량했다.
다행히 지금은 건강검진에서 안 좋게 나왔던 수치들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인바디 검사를 하면 마른비만, 내장지방 레벨 높음, 체지방량이 경도비만 수준으로 나온다. 아직 남은 5키로를 더 빼야 정상으로 돌아올 것 같다. 설상가상 근육량은 6.3키로나 더 늘려야 한다. 단순 홈트만으로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헬스를 등록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는 걸 사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사는 곳엔 헬스장이 없다. 그나마 가까운 헬스장까지 가려면 차를 타고 가거나 버스를 갈아 타야한다. 가뜩이나 운동 가기 귀찮은데 멀면 분명 등록해도 잘 가지 않게 될 것이다. 게다가 헬스 등록하는 비용도 부담스럽다. 못해도 몇 개월에 십몇만 원은 줘야 된다. 백수에게 그럴 돈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 이 모든 말들도 결국 핑계일 수 있다. 내 게으름을 감추고 의지를 유예하는. 한동안 그런 생각들 때문에 정체기를 겪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정체기를 겪을 때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핑계부터 빼고,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헬스 시설이 갖추어진,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공간은 없는가? 고민하던 중 집 근처 신축된 행정복지센터 내에 주민들이 사용 가능한 헬스장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다. 큰 맘 먹고 등록을 알아보러 갔더니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에 시설 이용이 가능했다!
전문 헬스장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어쨌든 집 근처에 저렴하게 운동 기구를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 있다는 게 어디인가. 정말 눈물나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당장 2개월치를 등록하고 집으로 왔다. 잘 안 신던 운동화를 꺼내 박박 씻어서 실내용 운동화로 쓸 수 있게끔 했다. 사은품으로 받았던 물병은 깨끗하게 씻어 말리고, 운동복으로 입을 만한 편안한 티셔츠와 바지를 챙겨놓고 나니 억만장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핑계를 대려면 끝도 없이 댈 수 있다. 끝내 찾아낸 집 근처 헬스 시설도 '헬스장이라기엔 시설이 다양하지도 않고 젊은 사람이 나밖에 없잖아!'라는 핑계를 들었다면 결국 등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중요한 건,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마음이다. 어떻게든 하려고 하면 주어진 환경과 타협을 해서라도 조건을 만들면 된다. 중요한 건 내가 추구하는 목표에 가까워지는 것이지, 당장의 환경과 조건에 타협할 때 생기는 회의감이 아니다.
러닝머신 위에서 30분 정도 뛰고 나면 헉헉대는 내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나를 끊임없이 절망으로 내몰던 내면의 어두운 목소리도 힘을 잃는 순간이다. 억수같이 흐르는 땀, 달음질 치는 심장박동, 한 모금의 물만 생각하게 하는 갈증은 내가 살아 있음을 증명한다. 이만큼 오기까지 정말 힘들었다. 힘들게 온 만큼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소중하다. 소중한 것을 알면 된 거다.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그 모든 과정들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이렇게나 소중한 줄 안 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