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ongbi Mar 05. 2023

ep.2 다시 일할 결심

내가 함안으로 이주하게 된 이유를 설명할 때 B선생님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후에 따로 B선생님과의 일화를 풀어보겠다.


B선생님은 남자친구의 농악 선생님이다. 남자친구는 나와 같은 대학교 같은 풍물패 동아리였다. 풍물패 동아리의 영향으로 나는 1학년 때 선배들이 추천하는 소위 “꿀교양” 수업인 ‘민속타악실습’을 들었다. 거기서 처음 B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그 때는 B선생님이 그냥 교수님인 줄 알았는데, 훗날 남자친구가 B선생님 밑에서 농악을 배우고 있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더군다가 교수님이 아니라 무형문화재 보유자 선생님이라는 걸 알고 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내게 있어 B선생님의 첫 인상은 ‘과묵한 교수님’이었고, 두 번째 인상은 ‘문화재 선생님’ 이었고, 세 번째 인상은 ‘국장님’ 이었다. 세 번째 인상은 선생님의 제안 덕분에 생긴 인상이었다. B선생님은 함안에서 가장 큰 축제의 사무국장을 맡고 계셨는데, SNS로 축제 홍보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내게 같이 일해볼 생각이 없냐고 제안했었다. 당시 나는 백수 3년차였고, 니트컴퍼니 11기에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에는 제안을 거절했었다. 표면적인 이유와 내면적인 이유가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렇다. 축제 기간에 잠시 일하는 거지만 어쨌든 출퇴근을 해야 했는데, 함안에서 본가까지의 거리가 제법 있었다. 버스가 많지 않은 데다가 무려 3번이나 갈아타야 할 노선이었기에 차가 없으면 출퇴근은 힘들었다. 나는 차가 없었다. 그렇다고 잠시 일할 건데 함안에 방을 구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당연히 돈도 없었다. 근데 더 큰 문제는 함안에 나와 있는 방도 없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랬고, 내면적인 이유는 이렇다. 잘 할 자신이 없었다. 앞선 두 번의 회사생활에서 크게 혼란스러웠던 경험이 있었기에 내 능력이나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불신이 컸다. 내가 일을 잘 못해서 실수하거나 홍보효과가 없으면 어쩌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열심히 하면 과하다고 싫어하고, 적당히 하면 대충 한다고 혼내는데. 어떻게 하면 '적당히'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 있지? 질문조차 바보 같았다. 남들은 눈치껏 잘만 하는 사회생활을 나만 눈치없이 망쳐버리는 것 같았다. 내가 이 모양인데 무슨 사회생활을 해.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가 있어. 자괴감이 들었다.




첫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한 번 제안을 받았을 때였다. 그 때는 니트컴퍼니 전시회 및 종무식 때문에 서울에 올라갔을 때였다. 고민해볼 시간을 주셨지만, 너무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축제 준비가 곧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에 올라가는 케이티엑스 안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오랫동안 질문했다.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지. 사실은 해보고 싶었다. 물리적인 제약과 심리적인 제약이 존재했지만, 내 마음은 ‘그 일이 어떤 일인지 궁금하고 한 번 해보고 싶다’였다. 그러나 '다시 일할 결심'을 하기에 용기가 부족했다. 심란한 마음으로 니트컴퍼니 전시회를 시작했다. 


사실 전시회도 참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서울은 너무 멀었고, 한 번 왔다 갔다 하는 데에 드는 비용이 백수로서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작품이 있는 전시회’를 해본 경험이 없어 자신이 없었다. 뭘 해야되지? 내가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게 대체 뭐지? 잘나고 능력 많은 사람들 천지인데. 내가 가진 능력은 '고작'일 뿐인데. 니트컴퍼니 회의 때 전시회 참석 여부를 얘기하면서 나는 솔직하게 내 생각을 얘기했다. 참여하고는 싶은데 서울에 왔다갔다 하는 비용이 부담스럽다고. 그러자 전환팀 부장님과 팀장님들이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왕복 교통비를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그 때부터 '해볼만 한데?' 싶었고,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돈은 어떻게든 단기 아르바이트를 뛰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교통비는 지원 받을 수 있으니, 하루 숙박과 끼니 해결만 하면 된다. 최저로 기준을 잡으면 어떻게든 모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무엇을 전시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하루 업무로 내가 정했던 일이 '브런치에 하루 1개씩 글쓰기'였으니까 그걸 엮어서 책으로 만들면 될 것 같았다. 책 제작 비용은 마침 니트컴퍼니에서 전시 지원금을 준다고 하니 부족한 비용만 충당하면 만들 수 있다. 책만 전시하기 허전하니까 책의 주제이기도 하고 내가 보여주고 싶은 주제이기도 한 '니트컴퍼니를 다니기 시작한 백수의 성장기'를 보여주면 된다. 성장기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니트컴퍼니 동안 나를 상징했던 모든 것들이다. 온라인 회의할 때마다 썼던 고양이 귀 헤드셋과 안경, 나름대로의 근무복으로 지정했던 줄무늬 티셔츠와 손목시계, 직접 만들어 본 사원증, 뭐라도 배우고 사람들도 만나고 싶어서 수료한 '마을활동가' 수료증, 회의하면서 메모했던 종이들, 그리고 브런치에 올렸던 모든 글들을 모은 책. 좋다, 하자.


전시회와 종무식에 참석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남자친구가 농악 공연하는 축제 행사장에서 일일 스텝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게 여전히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웠지만, 다행히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을 다들 좋아해주셔서 괜찮았다. 그리고 시간 날 때 부모님의 논밭에서 하루 일하고 일당을 받았다. 거의 집에만 있던 딸이 뭐라도 해보려고 하니 내심 좋아하시는 눈치셨다. 그리고 엄마가 '하고 싶으면 뭐가 됐든 일단 해보라'며 용돈도 주었다. 그렇게 서울에서 1박 2일 있을 만한 최소한의 돈을 모았다. 좋아, 가자.




니트컴퍼니 11기 전시회와 종무식은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전시회에 방문하는 걸 보고 좀 놀랐다. 온라인에서만 보던 ‘니트 동료들’을 실제로 마주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실제로 만난 니트컴퍼니 동료들은 사회가 말하는 ‘방구석 백수’ 같은 인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진짜, 전혀. 다들 호기심과 설렘으로 눈이 반짝반짝 거렸고, 수줍어 하긴 했으나 유쾌하고 즐거워했다. 그냥 ‘뭐라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모인 청년들이 즐거운 프로젝트를 하나 완성하는 과정 같았다.


같이 밥도 먹고 전시 준비도 하고 명함도 주고 받고 이야기도 나누다보니 하루만에 훌쩍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혼자가 아닌 기분’이 들었다. 혼자 방구석에서 하루하루 견디고 있을 때에는 세상에 나 혼자만 한심한 백수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더 초라하고 못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니트컴퍼니에서 '니트 상태'라는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니 더이상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를 힘들게 했던 공백상태도 그냥, 삶의 한 과정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겪는 상황을 각자의 방식대로 겪고 있구나. 그리고 각자의 방식대로 나아가고 있구나. 


니트생활자 대표님들과 팀별 팀장님들도 실제로 봤고, 니트컴퍼니와 같은 프로젝트를 후원해주시는 분도 만났다. 히키코모리처럼 방에만 있을 땐 세상으로부터 버림 받은 느낌이었고 모두가 나를 지탄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실제 내가 마주한 문 밖의 세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니트 상태'가 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고, 같이 한 번 어려운 한 걸음을 떼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사실은 다시 시작할 계기와 결심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이 서로의 앞날을 응원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전시회와 종무식이 끝나고 돌아가는 KTX 안에서 나는 B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함안으로 가겠다는 얘기를 했다. 결심이 서고 나니 나머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약이라고 생각했던 문제들도 나름의 돌파구는 존재했다. 감내해야 할 몫이 있다고는 해도, 불가능이 아니라면 해볼 만했다. 그 때, 상실되었다고 생각했던 자존감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질러놓고도 내심 불안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내가 서 있는 지점도 어차피 사회가 말하는 평범의 길에서 벗어나 있어. 그러니까 발길 가는 대로 가볼 수 있는 기회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것보단 나을 거야. 잘 하려고 하지도 말자. 그냥 해보자. 하는 데까지만 해보자. 그래도 안 되면, 도저히 못하겠으면, 그 때 다 포기하자.



근데 아직은 아니야. 좀 더 걸을 수 있어.



무근지님의 책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걸> 단행본 중. 전시회에서 읽고 마음에 들어서 한 권 샀다.



같은 전환팀이자 주간회의 정예맴버였던 옹나옹님이 해외여행 가서 찍은 사진. 귀여운 코멘트와 함께 선물받았다. 



니트컴퍼니 전시회를 다녀와서. 방문 나설 때마다 보면서 힘을 낸다. 포도송이는 아직도 채우는 중



매거진의 이전글 ep1. '히키코모리' 탈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