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ongbi Mar 20. 2023

ep3. 내 집 없는 청년의 정착기

B 선생님의 제안에 따라 함안에서 일하기로 했으니, 이제 '어디서 어떻게' 지낼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차는 살 수 없고, 방을 구하기도 애매했다. '차'와 '방'이라는 선택지를 고르기 어려웠던 큰 이유는, 나에겐 목돈이 없었다. 당연했다. 3년 동안 백수였으니까. 차가 있다고 하더라도 면허는 장롱에 처박힌지 오래였고, 딴데서는 흔한 원룸 매물조차 여기서는 잘 없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바로 일하는 기간동안 전수관에서 지내는 것이다.


전수관은 무형문화재의 전승 및 보존을 위해 세워진 공간으로, 몇박 몇일씩 전수를 오는 전수생들을 위해 숙식할 공간이 존재하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생활 공간으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번은 특수한 경우로, B 선생님께 일하는 동안 생활할 수 있게 해달라고 허락을 받고 지내게 되었다.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매일매일이 히키코모리 탈피를 위한 합숙 훈련이라고 생각하니 견딜 만했다. 생활이 결코 쉽지는 않았지만...



전수관에서 생활하려면 부지런해야 했다. 일을 제안받아 오긴 했으나, 공용 공간의 일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기에 전수관 관리도 신경써야 했다. 필수 일과는 단순했다. 아침 저녁으로 대문을 열고 닫는 것, 출퇴근 시간 맞게 생활패턴을 지키는 것, 사람들이 오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것, 주기적으로 전수관 청소를 할 것 등이다. 별거 아니지만 부지런해야만 가능한 일상이었다. 더불어, 혼자만의 시간은 거의 불가능 이었다. 가만히 있다보면 무조건 일이 생겨서 몸을 움직여야 했다. 혼자만의 시간은 지난 3년으로 충분하다는 듯, 전수관 생활은 바쁘게 돌아갔다.


처음에는 일찍 일어나고, 주변을 정돈하고, 사람들을 맞이하고, 사생활 없이 지내는 게 어색하고 힘들게 느껴졌다. 히키코모리 관성이 남아있어서였다. 하지만 어렵든지 말든지 해야만 하는 상황이니 하는 수 밖에 없었는데, 무작정 하다보니 무기력한 습관들이 점차 희미해졌다. 히키코모리 시절 버르장머리가 서서히 고쳐지는 걸 느낄 때면 일을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생활하다가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일을 괜히 시작했나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게으른 습관은 서서히 고쳐졌지만, 체력이 부족해서 과정이 눈물나게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전수관에서 인사와 스몰토크는 기본이었는데, 대인기피증과 불안장애로 힘들어했던 내게는 그런 순간들이 버거울 때도 있었다. 일은 크게 힘들 것 없었지만 3년 동안 리셋 되어버린 내게는 처음부터 다시 하는 일이나 다름 없어서 업무들에 적응하는 스트레스가 또 상당했다. 잘하겠다는 마음과 극단적으로 나약한 체력이 상충하여 뾰족한 행동으로 튀어나온 적도 있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폭풍 같은 정착기 동안 나는 그럭저럭 힘냈다가 힘뺐다가 하며 지냈다.



폭풍이 지나간 후, 나는 모든 과정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자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울적한 생각이나 하며 마음 속에 곰팡이나 키울 순 없었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다. 틈틈이 걱정도 됐다. 3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해서 잘 할 수 있을지, 잘 하고 있는건지 걱정됐다. 하지만 잘하든 말았든 일단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하겠다고 마음 먹은 일에 덤벼들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했다. 그동안은 나를 지독하고 가혹하게 몰아세우던 청춘 아니었나. 


20대 후반,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나에겐, 생각해보면 온통 감사할 일들 뿐이었다. 내게 기회를 주신 B 선생님께 감사했고, 기회가 왔을 때 독려해준 남자친구 K에게 감사했고, 어쨌거나 기회를 잡아 뭐라도 시도해본 스스로의 용기에 감사했고,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 되어 준 전수관에 감사했고, 기특하게 혹은 짠하게 바라보며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응원해주신 주변의 여러 어른들께도 감사했다. 감사하지 않을 일이 없었다. 마음이 겸허해졌다. 



지금은 겨우겨우 방을 구해 생활터전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 처음에는 돈이 없었다 치더라도, 막상 돈이 모였을 땐 집이 없었다. 이대로 정착을 해야될 지 말아야 될 지도 고민할 정도였다. 다행히 전수관 생활이 한계치에 도달했을 때, 운 좋게 딱 적당한 곳이 나와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과정 또한 정말 감사한 일이다. 내 집, 하다못해 내 월셋방 하나 구하기 힘든 세상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고 그와 동시에 내 공간이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피부로 느꼈다. 세상의 등쌀에 떠밀려 본가의 방 한구석에 배수진을 치고 있을 때, 기약 없는 날들을 묵묵히 기다려준 부모님께도 감사했다. 


전수관에서 짐을 빼면서 기분이 참 이상했다. 무모하게 느껴졌던 과정들이지만 어쨌거나 해냈다는 안도감. 공허하고 불운했던 지난 청춘은 그 안도감으로 위로할 수 있을 것 같다. 잘 버텼다고.



그리고 정착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 곤란하고 어려운 시절에, 막막한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일부터 묵묵히 해나가는 나의 정착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겸허한 마음으로, 내게 주어졌던 감사한 날들을 기억하며.



전수관의 밤하늘은 별자리가 잘 보인다. 별자리 잘 모르는데 찾아서 공부해도 될 정도로 선명하다.
전수관 마스코트(?) 제비들. 한땐 '제비들도 집이 있는데 난 왜 집이 없지?' 하며 한숨 쉰 적도 있지.
'안녕하세요?' 전수관은 친환경적이라 깨고락지들도 많다. 
전수관의 논두렁뷰. 힘들 땐 자연의 품에 안겨있으라는 말이 이해가 되더라. 힘들긴 했어도 우울하진 않았다.
힘들고 지칠 땐 웃음 포인트가 있으면 도움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ep.2 다시 일할 결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