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대륙의 아이들 그리고 외로운 나
좋은 학생들을 만나 행복했고 체계가 잘 잡혀있어서 배울 것도 많았던 두 번째 학교에서의 첫 학기가 끝나고, 걱정 없이 여유로운 3주간의 방학이 지나갔다. 다시 또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고 내가 어떤 반의 담당이 되었을까 확인했다. 오후반 담당이었다. 지원도 하지 않은 오후반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나는 말을 아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어디 올라가 보기도 전에 좌천된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의 모든 기준은 오전반이었고, 사실상 오후에는 공부의 의지가 없는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절반 이상은 사실이기도 하므로 교원들 사이에서도 오후반을 이끌어가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라는 사실을 모두 인정할 정도였다.
그래도 신입 주제에 이렇게 강의시수도 많이 받고 일할 수 있는 게 어딘가 싶어 힘을 냈다. 수업은 오후 2시부터 6시까지였다. 물론 출근 시간은 이보다 훨씬 더 빨랐다. 저녁에 끝나는 탓에 퇴근은 더 늦어졌지만, 나는 유일하게 자신 있는 부분인 나의 적응력을 자랑하며 생활패턴을 오후 수업에 맞춰가고 있었다. 말로 익히 들어 각오는 했지만 과연 쉽지 않은 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반은 모두 학부 신입생으로 대학교에 진학하기 전, 한국어 과정을 밟고 있는 중국 학생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의 국적으로 이루어진 반은 강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나뉜다. 나는 사실 단일 국적의 반을 크게 선호하지 않았기에 가능하면 오후 수업을 피하고 싶었다. 지난 학교에서의 추억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단일 국적 반의 장단점은 다음과 같다. 장점은 우선 같은 반 학생들끼리 단합이 잘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한 반의 담임이 된 것처럼 학생들과 정서적으로 유대관계가 생기기 쉬워진다. 그리고 수업 도입부나 한국 문화와 비교하며 설명할 부분이 있을 때 하나의 문화권만 고려하면 되므로 수업 자료를 모을 때 용이하다. 단점은 학생들 끼리 친한 만큼 모국어의 방해를 크게 받는다. 그들은 쉬는 시간 뿐만 아니라 수업시간에도 모국어로 크게 떠드는데 이 때 가끔 강사의 목소리가 묻힐 때가 있다. 그리고 한 나라 이외에 비교할 것이 없기 때문에 각자의 문화를 설명하는 말하기 활동에서의 참여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그리고 태도가 좋지 않은 타 학생의 영향을 크게 받고, 이미 반 안에서 소통이 되므로 학생들이 한국어를 공부하려는 의지가 약한 편이다. 또 강사의 입장에서 그 국적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주 외로워진다.
그러하다. 애석하게도 나의 중국어 실력은 ‘이건 아주 맛있는 아이스크림입니다.’를 문장으로 겨우 만들어 낼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야말로 초급반 중도 포기자 수준이기 때문에 학생들이 말하는 중국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이 수업 도중에 그들의 언어로 떠들 때마다 나는 화면에 인터넷 사전을 띄우고 중국어로 ‘외롭다’를 검색해서 학생들에게 “여러분 저는 지금 정말 꾸두! (孤独)[gūdú]”라고 외치곤 했다. 중국 학생들은 내가 그런 반응을 보일 때마다 무척 재미있어 하고 또 좋아했지만 애석하게도 웃으며 첨언하는 말마저 중국어로 내뱉었다. 레이디스 앤 젠틀맨! 여러분! 저는 중국어를 전혀 알아 듣지 못한다고요. 네? 저 외롭다고요! 꾸두!
중국인 학생들은 그래도 대체로 서로 예의를 지키는 편이었다. (아주 가끔 한 손으로 숙제노트나 종이를 패스하듯 휙 던지는 학생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그냥 나의 긴 팔로 잘 받으면 되니까 괜찮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중국인 여학생들은 붙임성도 좋았다. 그런 탓에 학기 말에는 정말 친해져서 조금 과하게 친근함을 표시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지난주에 한 쇼핑리스트와 이번 주말에 살 목록을 알려주거나, 전 남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늘어놓는 등 TMI 대잔치가 매주 벌어져서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적당히 대답할 수 있었지만 선생님은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이냐고 묻는 학생의 질문에는 대답을 심히 주저한 기억이 있다.
비록 한 국가의 학생들이지만 수업 도중에 예상할 수 없는 행동들의 다양성은 엄청났다. 어디로 튈지 그 반경조차 모를 일이었다. 대륙의 기상을 품은 이 엄청난 20대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한국어 선생님인지 생활지도 선생님인지 헷갈릴 때가 가끔 있었다. 하지만 학기가 끝난 후에 엘리베이터나 계단에서 만나면 “썬쌩님! 안녕하세요!”라고 참 넉살도 좋게 인사하거나 사랑한다 하며 냅다 안기는 얼굴들이 정말 웃기고 사랑스러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