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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떰브 Sep 02. 2020

한국어 선생님 일기 09

09 전 이 세상의 굴레와 속박을 그대로 안고 떠납니다

현실은 늘 그렇듯 꿈보다는 뒤쳐진다. 내가 머릿속에서 그린 그림과 가까이에서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그림은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의 멋없음’이 우리네 삶에서 영원히 피할 수 없는 고통일까? 물론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바뀔 것이며, 나는 그 격차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추레한 현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그 다음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고민하는 편이 훨씬 더 생산적이니까 말이다. 2016년에 전공 공부를 시작한 것부터 2020년 중반기까지 햇수로 4년간 한국어 교육과 관련하여 연구하고, 일했다. 그리고 2020년 6월부로 나는 잠시 이 업계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코로나 사태에 직격탄을 맞지 않은 곳을 찾기 힘든 요즘이지만, 이 업계는 더욱이 그러했다. 하늘길이 막히며 해외에서 더 이상 학생들이 들어오지 못하자 학원은 물론 서울의 주요 대학의 어학당 역시 신입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 남아있던 학생들도 절반 이상 영구 귀국을 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교들은 교원 인원을 감축하기 시작했다. 처음 우한에서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다른 일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더 이상 업계의 미래가 불분명하게 느껴졌다. 마침 학교에서도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본격적인 인원 감축에 들어가기로 한 듯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화살은 기간제 교원들을 향했다. 학교에서는 나를 비롯한 신입들을 대상으로 재계약 심사 요청서를 쓰라는 메일을 보냈다.


<‘쇼미 더 머니’ 어학당ver.>

Shout out to Covid-19! Hey 거기 기간제, 재계약 되고 싶어? 그럼 요청서를 써서 바쳐!

우리가 할 일은 심사, but 너희가 할 일은 퇴사! 훠우!

자막 – ‘과연 합격 목걸이를 가져갈 주인공은?’

심사위원 : A씨는… 우리와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자막 – 그리고 그의 손에 쥐어지는 합격 목걸이

심사위원 : 개미 씨는…아쉽게도 우리와 함께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메일을 보는 순간 어쩐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은 위와 같았다. 가뜩이나 나이 서른 줄에 다시 하게 된 진로 고민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이제 합격 목걸이까지 구걸해야 하는 처지라니! 알량한 자존심이 밥을 먹여 주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밥 먹고 살려면 자존심 다 죽이고 다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 어리고 어린 나는 이래저래 기분 나쁜 마당에 얕은 자존심이라도 지켜서 나가자 싶어 그 날 바로 사직서를 써서 제출했다. 물론 신호를 준 건 상대방이었지만 헤어지자는 말은 반드시 내 입에서 나와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이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삼고 싶어 조금 이르긴 하지만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 Two를 열어 보기로 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원서를 모 대학원에 접수했고, 퇴사일 바로 다음 날에 전공 면접을 보러 갔으며, 결과적으로는 합격했다. 오랫동안 꿈으로만 남겨둔 ‘글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9월부터 대학원에서 비평론과 시나리오 작법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내 인생에 공부가 어디까지 일까 싶어 조금 걱정이 되긴 하는데, 그래도 대부분은 무척 설레는 요즘이다.


채용이나 계약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자주 입었던 한국어 교원 생활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꽤 즐거웠다. 덕분에 지금도 가끔 안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몇몇 좋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생각나면 웃음 짓게 되는 외국인 학생들과의 에피소드들도 많이 생겼다. 지금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업계를 떠나기로 결심하며 이렇게 회고록을 남기지만,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법. 언젠가 내가 더 나이가 들거나 혹은 사는 게 과연 녹록지 않다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다시 한국어 교원 신분으로 돌아와 수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건 정말 아무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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