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모든 것을 오래도록 기억하지 못해서 나는 매 시험기간마다 이 고생을 하는 건가 싶던 어린 때가 있었다. 사진 찍어내듯 그대로 머릿속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렇게 교과서에 밑줄만 가득해지진 않을 텐데 하고 말이다. 이후 몇 번의 죽음을 목격하고 또 헤어짐을 겪었다. 인간이 모든 걸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사는 게 얼마나 끔찍하겠냐는 한 어른의 말이 사무쳤다. 라디오에서 들은 것인데, 몇몇 동물들의 짧은 기억력은 사실 퇴화가 아니라 진화의 결과라고 한다. 잊어야만 살 수 있는 순간들이 온다. 그렇다면 망각은 축복일까.
한창 자기소개서를 찍어내듯 쓰던 때에 가장 어려웠던 질문은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써 내렸던 답변은 19살 크리스마스 때 호주 멜버른에서 헬기를 타며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내려다봤을 때 가장 행복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번지르르하고 자랑하기에 좋은 기억이긴 하지만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것이라고 말하기엔 어쩐지 부족하다. 여태껏 살면서 벅찰 만큼 행복했던 적은 아주 여러 번 있었던 것임이 분명한데 어떤 상황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지가 않는다. 힘들었던 순간들은 어느 정도 자세히 읊을 수 있으나 행복했던 순간들은 그 느낌들만 남아있다. 괴로움은 보통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오고 행복은 찰나에 오는 것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나를 지탱하던 기둥이 뿌리째 뽑히고 내가 믿던 세상 전체가 흔들릴 때에도 견뎌낼 힘은 결국 행복한 기억들이 아니라 잊히는 과정에서 왔다. 오히려 행복하고 좋았던 기억은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부추겨 당시의 괴로움에 더 무게를 실어주었을 뿐이었다. 사람은 추억으로 산다는데 그 추억들의 대부분은 사실 잊히고 옅어져 미화된 괴로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잊고 싶은 기억들이 남아있고 기억해내고 싶은 순간들 역시 아주 많다. 매일 가는 공간에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고, 새로운 공간에서 이전의 익숙함을 떠올리고, 오랜만에 발길이 닿은 공간에서 잊고 지냈던 기억들을 마주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에는 결국 기억함과 잊힘이 있다는 것.
아무리 멀리서 봐도 비극인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차마 희극으로 치환되지 않는 버거운 순간을 가지고 있음에 괴로워 말고, 잊히지 않는다는 것에 자책하지 말고, 굳이 희극으로 만드려 애쓰지 말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