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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떰브 Oct 27. 2020

행복일기 1

2020.10.26 (월)

미래에 대한 걱정에 불안감이 차곡차곡 쌓이던 요즘, 어제는 급기야 남자 친구 앞에서 엉엉 울었지요.

나를 다독이면서도 냉철하게 전하는 좋은 말들을 자극제 삼은 탓인지 오늘 아침은 어쩐지 달랐어요.

오늘은 중간시험으로 인해 입학 후 처음으로 학교에 갔어요. 코로나 때문에 줄곧 온라인으로만 수업을 한 탓에 그동안 캠퍼스를 누빌 일이 전혀 없었거든요.

사실 학교로 가는 길에 주황색 신호에 무리하게 좌회전하려다 혼자 사고가 날 뻔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저 다시 한번 내 운전 능력을 과신하지 말자는 다짐과 안전 운전에 대한 경각심을 스스로에게 불러일으켰을 뿐이에요.

오늘 하늘은 먼지 투성이라 뿌옇게만 보였지만 가을 단풍이 잔뜩 든 학교는 정말 정겹고 예뻤어요. 햇살도 따뜻하고 반짝거려서 그냥 걷기만 하는데도 행복감이 느껴졌어요. 어제 대체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울었는지도 모를 기분이었지요.

시험도 그럭저럭 괜찮게 본 것 같고요. 마음 따뜻한 교수님이 건네신 찹쌀떡도 참 맛있었어요. 마침 배가 많이 고팠었거든요. 대학원생이지만 1기생 선수과목이라 영문학과 학부 수업에 참여 중이에요. 대부분 2학년 정도 되는 학생들이래요. 솔직히 그냥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마음이 싱그러워지는지, 겨우 20대의 끝자락에 있으면서 벌써 이렇게 인생 다 살아본 어른처럼 말이에요.

학교에 떨어진 낙엽들을 밟고 학교를 한 바퀴 휘돌며 익숙하지 않은 캠퍼스 안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주차한 건물 입구를 찾으러 다니는 와중에 백팩을 메고 뛰어다니는 앳된 얼굴의 여학생들이 저에게 길을 물어보기도 했어요.


시험을 보고 난 후에는 남자 친구와 만나 저녁을 먹었어요. 남자 친구에게 어제 같이 놀았으면서 왜 오늘도 또 나랑 놀아? 하고 괜히 물어봤는데, 오늘도 보고 싶어서 그랬지~ 하고 말했어요. 우리가 저녁을 먹은 곳은 미사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꽤 오래전에 라이브 카페였던 공간을 식당으로 쓰고 있는 듯했어요. 무대로 보이는 곳 위에는 테이블 2개가 붙여져 놓여있고, 그 무대였던 공간을 중심으로 소파의자와 테이블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이었어요. 천장에는 촌스러운 샹들리에가 가득했는데, 놀랍게도 이 곳은 복어 전문점이었어요. 그 공간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단 하나 서로 어울리는 게 없어서 남자 친구와 같이 많이 웃었어요. 티브이 옆으로 보이는 에어컨 중간에는 -죄송합니다. A/S 불렀어요. “고장”-이라는 글씨가 핑크색 형광펜으로 쓰여 있었지요.

간만의 복어 요리라 정말 맛있게 먹어보려 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생리통에 괴로워하느라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해서 좀 아쉬웠어요. 그래도 남자 친구가 옆에서 잘 먹어주니 좋더라고요. 집으로 돌아와서는 진통제를 먹고 남자 친구가 데워준 찜질팩을 배 위에 올리고 누워 있었어요. 조금 나아지려고 할 때 남자 친구가 무슨 아이스크림을 먹겠느냐고 해서 어떤 거 있어? 하고 물었더니, 냉동실 한 칸을 그대로 뽑아와서 제 옆에 들고 왔어요. 너무 웃겨서 사진도 찍었어요.

냉동실에 다시 집어넣는 소리가 우당탕탕 나기는 했는데 즐거웠어요. 남자 친구는 정말로 제 인생 엔도르핀 제조기예요. 그나저나 더블 비얀코는 밑에 깔려 있는 셔벗이 진짜 맛있지 않나요? 딸기향과 사과향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이 부분을 빨리 먹으려고 더블 비얀코의 윗부분인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의무감으로 먹어치워요. 그러니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기다림의 맛, 셔벗은 목적 달성의 맛.

다행히 진통제가 잘 들어서 배가 쪼그라드는 느낌은 덜 해졌는데 갑자기 연시가 너무 먹고 싶어 졌어요. 남자 친구에게 사다 달라고 했다가 결국 저도 같이 손잡고 내려가서 동네 슈퍼에서 쇼핑을 하고 왔어요. 과자랑 연시 사들고 돌아와서 연시를 바로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 행복했어요. 얼마 만에 먹는 감인지, 가을이네 싶어서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요. 연시를 두 개나 먹고, 또 무화과까지 하나 먹었어요. 나는 이렇게 물렁한 것들을 참 좋아하는데 남자 친구는 물컹, 물렁한 식감의 음식들을 제일 싫어해요. 밥도 저는 조금 진밥을 좋아하고 남자 친구는 완벽한 꼬들밥 파예요.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의 식성은 정말 극과 극에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무화과까지 다 먹고 나니까 남자 친구가 전자레인지에 바나나 파이를 돌려서 먹어보라고 줬어요. 와, 따뜻한 바나나 팬케이크나 타르트를 먹는 느낌이었어요. 여기에다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셔주니 환_상_! 사실 그냥 바나나 파이는 별로였는데, 따뜻하게 먹으니까 훨씬 더 좋았어요. 이건 우리 둘 모두의 취향을 만족시켜 주니 더할 나위 없었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다른 취향을 가졌다는 건 서로의 다름을 보며 즐거워 할 수 있는 일이고, 가끔씩 그 안에서 접점을 발견하게 되는 건 아주 기쁜 일이에요.

내일은 또 얼마나 기분 좋은 바람이 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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