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는 도대체 생일이 언제예요? 저번에 언제였더라... 카톡에 떴었는데 설이었나??" 아니, 아니다. 그냥 아무 날이나 막 집어넣었다. 가족이 모이는 명절이나 생일은 나에겐 아무 날이다.
가족은 '주어진' 사람들이다. 어떻게 해서든 받아들이고 품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다가 설령 나에게 상처가 나더라도 말이다. 나와 같든 다르든, 혹은 나와 맞든 안 맞든 다양한 성격과 삶의 모습을 인정하고 본인이 맞춰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건, 가족 내에선 더더욱 통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여러 차례 나온다. 배우자를 존중하라, 이웃을 돌보라 등등도. 뭐 어느 종교의 경전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가르침들 앞에서 나는 참 초라한 사람이었다. 부모도 동기간도 배우자도 품지 못했으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몸과 정신이 상해서 직장을 그만두어 돈을 벌지 못하게 되자 엄마는 이제 사위에게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나처럼 모진 사람이 아니다. 엄마는 이번엔 동생과 번갈아 남편에게 전화를 했던 모양이고 남편은 결국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내게 상황을 얘기했다. "대출 한도를 두 배로 늘려줄 테니 보증을 세우라"고 농협 직원이 엄마에게 말했다는 거였다. 그게 적법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한 번 마음먹으면 물러설 사람이 아니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번이 엄마랑 마지막 돈거래야. 나로 끝내. 사위는 남이야." 남편이 보증을 서고 엄마는 농협에서 큰돈을 대출받았으며, 그 후로 나는 매달 농협에서 걸려오는 이자 독촉 전화를 받아야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딸이 태어난 후 시댁에서 몸조리를 할 때 동생이 찾아온 적이 있었지만, 나는 아이를 안아볼 시간을 주지 않았다. 동생은 잠시 앉아 있다가 일어섰다.
몇 년 후 남편 회사로 최고장이 날아왔다. 무슨 영문인지, 그동안 우리에게 아무 연락이 없던 농협에서 남편의 월급을 압류하겠다는 통지를 회사로 보낸 거였다. 엄마는 정말 끝내 이렇게 하고 마는구나... 하필 그 최고장이 수신자를 단박에 찾아내지 못하고 여러 부서를 전전하는 바람에 남편의 '돈 문제(?)'는 여러 사람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내가 첫 직장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에 낯을 들 수가 없었던 그 일이 남편에게 닥칠 수도 있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역시나 그동안 이런 상황을 모르고 계셨던 시부모님은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남편에게, 적금을 깨고 돈부터 갚으라고 하셨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얘, 내가 애들 봐줄 테니까 급하게 뛰어 댕기지 말고 천천히, 차분히 일 보고 와." 감사함보다 수치심이 앞섰다. 울 수도 없었다. 울 낯짝도 없었다. 수년간의 이자까지 보태져서 많이 불어난 그 돈을 갚으려고 남편이 결혼 전부터 성실하게 모아둔 적금을 한 푼 안 남기고 고스란히 버려야 하는 거였다.
법원에 공탁금을 맡기고 시댁에 돌아와서 엉엉 울었다. 그제야 시어머니께 죄송하다고,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 죄송하다고 울었다. 어머니는 그러셨다. "느네 엄마 너무 미워하지 마.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넌 자식이니까 이해해야지." 전 못해요. 너무 지쳤어요. 이제 그만 보고 살래요. "그럼 못써. 설령 부모가 죄를 지었어도 부모는 부모고 자식은 자식이야."
나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영영 엄마를 찾지 않았다. 그 와중에 동생이 남편의 회사에 전화를 걸어서 "형부 친구 중에 누구 보증 좀 세우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 미친년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돈이 없다면서 왜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있는 건데! 남편의 통장도, 인터넷 뱅킹 공인인증서도 다 내놓으라고 했다. 내가 쥐고 욕을 먹는 게 나았다. 다시 말하지만 남편은 모질지 못한 사람이다.
결혼을 후회했다. 돈을 다 뺏겼더라도 나는 그때 유학을 갔어야 했다. 어떻게 해서든 은행 잔고증명을 하고, 가서 굶어 죽을 각오로 이 지긋지긋한 땅을 떠나고, 지독하게 혼자로 살다가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이 수렁 같은 가족 속에 누군가를 끌어들여서는 안 됐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저 감당해야 했을까. 남편이 나 모르게 돈을 보내든 말든, 동생이 남편 회사로 찾아오든 말든 시부모님께 머리를 조아리며 버텨야 했을까. 엄마의 자살 협박에 내내 마음 졸이며 정신병을 앓아야 했을까. 그렇게라도 내 아이들에게 외할머니와 이모들을 만들어줘야 했을까.
오래전부터... 동생이 엄마에게, 저잣거리에서도 듣지 못할 상스러운 욕을 거침없이 해대는 걸 옆에서 보았을 때 ’가족’이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엄마는 그런 동생에게 "역시 내 딸"이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 날은 내 스무 살 생일이었다. 눈 앞에서 벌어진 그 상황은 부조리극의 한 장면 같았다. 이게 정상인가... 내가... 미쳐가고 있는 건가...
얼마 후 동생이 아버지를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때렸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러나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엄마에게 "병원에 가 봐야 한다"라고 말했지만, 엄마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들은 아버지는 "자식을 정신병자로 만들 수는 없으니 내가 아무 말 않고 그냥 맞겠다"며 울었다고 했다. 나는 아버지를 설득하지 않았다. 말했잖나, 상대방더러 변하라고 하는 건 가족 내에선 안 통한다고.
언젠가 신문에 존속살해 기사가 날 수도 있고 그게 내 부모일 수도 있으리라는, 좀 멀리 나간 상상을 했지만 그렇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음에 무력했다. 몇 년 후 생일을 견딜 수 없어서 집 밖을 싸돌아다니다가 돌아온 날도 아버지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동생 곁에서 세상 서럽게 우는 엄마를 보았다. 엄마는 말리지 않았다. 뭔가에 놀란 사람처럼 급하게 한숨을 몰아 쉬는 버릇은 그렇게 생겼다. 그래야 정신줄을 놓지 않을 수 있다.
엄마와 동생이 단둘이 살 때 동생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내 신혼집에 짐을 싸들고 왔다가 짐도 풀지 않고 다시 내려가는 엄마를 멍하게 지켜만 보았다. 이미 깨질 만큼 깨진 정신은 버텨낼 힘이 없었다. 곧 아이가 태어날 거였다. 그 후로 연락을 끊은 엄마를 애써 찾지 않았다.
부모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가족의 이름으로 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어머님도 그 '어떤 일' 안에서 내가 무엇을 겪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르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걸 감내해야 했다면 나는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셈이다. 품을 수 없는 엄마와 동생을 떠난 죄는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나중에 죽어서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섰을 때 하나님이 그 죄과를 물으시면 기꺼이 지옥에 갈 거다. 그걸 각오하고라도 이전에 남편의 통장을 빼앗고 남편 앞을 막아섰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외가'라는 흔한 말을 빼앗고 그 앞을 막아설 거다.
"자매님,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세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죄랍니다." 소리 하는 사람들은, 어디 그럼 나랑 인생 바꿔보든지. 용서라니, 그게 맞는 단어인가? "용서를 해도 얼마든지 자식을 지킬 수 있다"라고 말만 하지 말고 그걸 얼마나 잘하는지 좀 보게. 자기 생일에 기쁘게 생일 축하 노래를 들을 수나 있는지 좀 보게.
어떤 벌을 받더라도 이 착취와 탐욕과 폭력과 정신병을 내 선에서 끊어야 한다. 아무도 이걸 ‘같이’ 감당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빽빽이 화살을 맞은 방패 뒤에 숨어서 자식을 안고 있다. '이모한테 맞은 외할머니가 불쑥 찾아와서 악을 쓰고 엄마 돈을 뜯어다가 다시 이모에게 주는’ 외가 따위... 자식에게 절대 주지 않을 테다. 명절마다 친정은 다녀왔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친정 없다고 한다. 기도도 하고 찾아도 가고 할 친정은 내게 없다.
명절 때마다, 가족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냥 성경 읽으면서 내가 스스로 가슴을 칠 테니, 신앙을 명분으로 용서하라는 말은... 방패를 내려놓으라는 말은 제발 하지 말았으면 한다. 생일 따위도 묻거나 기억하지 말았으면 한다. 내 자식들도 내 생일은 아무 날로 조용히 넘어가준다. sns에 언제라고 적었는지 나도 기억 못 한다. 생일 그거 정말 아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