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완주 Jan 30. 2021

Credit

상담 종료 보고서

상담이 끝났다. 예정되었던 아홉 번의 세션이 2주 전에 종료되었다. 선생님과 웃으며 작별할 수 있어서 참 감사했다. 상담이 끝날 무렵에 부서장이 바뀌고 업무가 조정되어서 외적인 스트레스 요인이 사라진 것이 이 바람직한 작별에 큰 몫을 했다. 게다가 후임자가 7급 공채 출신의 젊은 6급 주사님이다. 도청 기획팀 출신이라 내가 업무를 인계인수해줄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온 것도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그동안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것들과 나의 노력들은 그와 별개로 의미가 컸다. 다음을 대비하는 차원이다. 어떤 것이 도움이 됐느냐는 질문에 웃으며 주섬주섬 대답했는데, 마지막으로 "혹시 기억에 남는 게 또 있나요?"라고 물으셨을 때 나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이고 결국 또 눈물이 나고 말았다.


"그 일을 얘기해버린 거요."


두세 달 전에 나는 '잠에서 깨는 꿈'을 꾸었다. 마치 <인셉션>처럼... 잠옷 바람으로, 여자들이 몹시 분주하게 일하는 주방 문턱에 널브러진 채 잠에서 깨어나는 꿈이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민폐 상황이다.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고 여자들은 나를 넘어 다녔다. 그들의 옷에 그려진 빨간색, 초록색 무늬가 선명하게 내 앞을 오갔다. "죄송해요, 제가 계속 이렇게 누워있었나요?" 나는 외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일어날 수도 없었다. 여자들은 내가 마치 물건인 듯 넘어다니며 자신들끼리만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었다.


그냥 그 당시의 내가 모두에게 민폐이던 현실이 나를 짓눌러서 꾼 꿈인 줄 알았다. 한참이 지난 후 꿈속의 그곳이 하필 주방의 문턱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차리고 소름이 끼쳤다. 가둬놓은 기억 하나가 제 발로 내 꿈에 침입한 것이다. 주방 문 앞의 작은 방에서 시작된 내 최초의 기억. 엄마와 고모들의 방관 하에, 바삐 일하는 여자들의 발에 걸리적거리며 누군가의 쉬운 장난감이었던 사건이 저 밑바닥 갇혀있던 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말하지 않기 위에 글을 썼지만 글을 쓴 후에 결국은 털어놓았다.


내가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힘겨운 그 일을 말할 때 선생님은 같이 울었다. 누굴 울릴 생각은 아니어서 그런 반응은 낯설었다. 그동안은 말할 수조차 없었다. 오래전에 딱 한 번 얘기를 꺼내보려고 했었을 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답을 들었었으니까. 그래서 선생님의 눈물은 그 사건 위에 흘려진 최초의 눈물이었고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되었다. 상담이라는 직업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만, 나의 고통을 가볍게 넘기지 않는 타인의 마음이 처음으로... 마음속의 감옥에 닿았다.


선생님이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지 말고 지금만 생각하라’고 했던 건 그 일을 말하기 전이었으나, 사실 내 꿈에 난입한 최초의 과거에 이미 다시 발목을 잡힌 후라서 쉽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 이전에 애초부터 나는 첫 단추가 잘못 끼어진, 그런 사람이었던 거다. 누군가 쓰고 버린 장난감, 발에 차여도 거들떠보지 않을 장난감. 내가 부엌문 앞에 널브러져 사람들의 발에 걸리적대는 장면은 과거의 현실이자 지금의 악몽이었다.


“그래도 저 선생님 말씀 잘 들으려고 숙제 열심히 했어요.”


아마 선생님의 눈물 덕분이었을 것이다. 아무도 귀 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는 이야기, 어쩌면 ‘유난스러운’ 나에게만 아픈 건지도 모를 이야기를 무겁게 들어준 최초의 눈물이 나를 일으켰고, 그 이야기를 해버린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발목을 끄집어 당기는 무거운 과거를 끊어내고 무사히 지금을 버려 내일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시계는 또 종료시간을 30분이나 지났는데... 마지막 날조차 그런 눈으로 저를 보시면 어떡해요...


의도치 않게 기승전결이 너무 분명했던 아홉 번의 상담은 그럭저럭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다음에 또 넘어지면 선생님 찾아와도 되느냐고 했을 때 선생님은 말했다. "물론이죠. 하지만 그때 제가 아닌 누굴 만나든지 00씨는 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 거예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이 이야기를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크레딧을 적을 차례다.




ㅎㅅ언니... 같이 과장님 욕해 줌. 응급실 갈 때 보호자 해 줌. 안아준다면서 나한테 안겨 줌. 기도해 줌.

ㅅㅁ주사님... 퇴근하다 되돌아와서 같이 병원 찾아 헤매 줌. 내가 찡찡댈 때 무릎에 앉혀 줌.

ㅈㅅ언니... 나 대신 운전해서 집 데려다 줌. 머리 쓰다듬어 줌.

ㅎㅈ팀장님... 응급실 병원비 내라고 카드 줌. 물론 쓰지는 않았음. 팀에 나를 받아 줌.

ㅈㅈ팀장님... 팀에서 나를 내보내 줌. 비상근무 대신 해 줌.

ㅌㅎ주사님, ㅇㅎ주사님... 내가 못한 일들 다 커버해 줌. 괜찮다고 말해 줌. 안 미워해 줌.

ㅌㄷ 언니 & 형부... 우주대왕맛 막국수 장인. 밥값 만원 깎아 줌.

ㅁㅇ주사님... 자꾸 '주사님, 괜찮아요?'라고 메신저 해 줌.

ㅇㅅ이, ㅁㅅ언니... 밥 사 줌.

ㅇㅇ언니 & 형부... 같이 버텨 줌.

ㅇㄹ... 씩씩하게 잘 지내 줌.

오리 & 구니... 엄마 키워 줌.


이*윤 가수님... 울고 싶은 만큼 허송세월 해 줌.

릴*이 가수님... 버티고 이겨 줌.

이*라 가수님... 태어나 줌.


브런치 & 읽어주신 분들... 글 쓸 수 있게, 숨 쉴 수 있게 해 줌.


그리고...


ㅈㄹ... 35년째 나를 곁에 두고 봐 줌. 꾸준히 생사 확인해 줌. 숙식&치맥 제공해 줌.


모두 고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리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