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넘어질 나에게(3)
아주 오래전에 친구가 페이스북에 한 성악가의 <겨울 나그네> 동영상을 올렸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말이다. 그 친구의 취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므로 주저 없이 동영상을 클릭했다. 이 연가곡 중에 가장 잘 알려진 <보리수>였다. 카메라가 피아노 반주를 하는 다니엘 바렌보임으로부터 성악가의 얼굴로 옮겨가고 그가 첫 소절을 부르는 순간 와... 이건... 요즘 말로 '찢었다.' 오랫동안 들었던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의 <겨울 나그네>가 순식간에 모두 잊어질 만큼 깊고 무겁고 부드럽고 맑은 목소리였다. 피셔 디스카우가 세련되고 귀족적이라면, 이건 정말로 나그네같았다. 두어 소절이 지나 카메라는 노래하는 그의 전신을 풀샷으로 잡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며 입을 막았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의 이름은 토마스 크바스토프. 그는 장애인이었다. 팔은 없고 어깨에 손과 손가락이 몇 개 붙어있었으며, 다리는 짧았다. 1950년대 유럽에서 판매되던 입덧 방지제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으로 태내에서 사지가 정상적으로 발달하지 못하는 해표지증을 가진 채 태어났다. 당시 유럽은 크바스토프와 같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매우 많았다. 탈리도마이드는 동물실험의 안전성 검증을 거쳤으나, 정작 인체에는 치명적인 독성을 보였던 것이다.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신체적인 장애로 인해 '피아노를 칠 수 없어서 안 된다'는 이유로 음악 학교 입학을 거부당하는 등 여러 번 진로를 바꾸고 좌절했으나 결국 그는 늦은 나이에 데뷔해서 독보적인 바리톤이자 재즈 가수로 활동했다.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된 비극에 자신의 목소리를 묻지 않았다. 몸에 남은 비극에 잠식되지도, 그것으로 환심을 사지도 않는 진정한 거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빅맨(Big man)이라고 부른다.
우울의 우물에서 조금 멀리 벗어난 지금 나는 필사적으로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써대는 중이다. 언젠가 그 우물가로 다시 돌아오면 주위의 사람들이 보이지도, 말이 들리지도 않을 테니까. 정신 좀 멀쩡할 때, 생각 속에 부유하는 것들을 붙잡아 '나아가기 위한 애도' mourning to move on으로 남겨놓아야 한다.
오랜만에 크바스토프의 <겨울 나그네> 연가곡을 듣다가 <보리수>를 마음속으로 따라 불렀다. 성문 앞 그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부르다가 기억이 안 나서 인터넷으로 가사를 찾아보았다. 음악 선생님이 외우랄 때 말 좀 들을걸...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나는 그 그늘 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서/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온 나무 밑
오늘 밤도 지났네 보리수 곁으로/캄캄한 어둠 속에 눈 감아 보았네
가지는 흔들려서 말하는 것같이/동무여 여기 와서 안식을 찾아라
나의 우물은 집요하게 끌어당기는 음산한 중력의 공간이었다. 굳이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본 적은 없는데, 굳이 떠올려보니 그곳은 어둡고 그늘진, 들여다보면 암흑뿐인 그림이었다. 아마도 그곳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같은 어둠을 떠올릴 것이다. 그림을 다시 그려보면 어떨까... <보리수>의 가사처럼 그냥 그렇게 기쁘나 슬플 때나 찾아와서 안식할 수 있는 따뜻한 우물을 그려보면 어떨까...
이어폰을 꽂고 종이를 꺼내 들고 괴발개발 그림을 그려보았다. 다시 우물가로 돌아올 나에게, 머리를 기대어 쉴 수 있는 나무 한 그루 아래 작은 둔덕과 햇빛이 비추는 밝은 우물을 보여주었다. 똥손으로 열심히 그렸다. 크바스토프는 계속 보리수를 불러주고 나는 계속 연필과 지우개를 바꿔가며 그가 말해주는 풍경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봐, 이제 여기가 내 우물이야. 기억해. 난 나무 그늘에 기대앉아서 우물을 보는 거야. 거긴 마른 마음을 적셔줄 따뜻한 물이 살아.'
문득 크바스토프의 아픈 몸을 생각한다. 뜨거운 조명 밑에서 긴 시간 노래를 부를 때 자신의 얼굴에 흐르는 땀조차 닦을 수 없는 그의 흔적 뿐인 팔과 젖은 얼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는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생각한다. 아무에게도 변명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탓하지 않는 빅맨의 목소리가 나의 우물을 바꾸고 있다.
내가 몸에 남은 흔적과 정신에 남은 흉터들을 변명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탓하지 않는 사람이 될 기대는 없다. 사람은 다들 자기 몫이 있다. 그냥 나는 작은 사람으로 나무 그늘에 앉아있기로 한다. 빅맨의 보리수에 머리를 기대고, 가지를 흔드는 바람으로 숨을 쉬며 우물가에서 쉬기로 한다.
노래가 단조로 접어들 무렵 저기... 내가 우물로 온다. 우물을 들여다본다. 망설이다가 물 긷는 통을 던져 넣는다. 줄을 당겨 끌어올리고 물을 마신다. 보리수 열매가 우물에 떨어졌었는지 몇 개가 동동 떠있다. 물은 따뜻하고 보리수 열매는 시큼하다. 메마른 목을 달랜 나는 다시 햇빛 속으로 걸어간다. 음악은 다시 장조로 바뀌었다. 그렇게... 그렇게 살아보자.
친구가 보내준 것은 유튜브가 아니었지만, 찾아보니 유튜브에도 같은 동영상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