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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꿀 Jul 07. 2019

드럼 배우기

'당연히 못함'

운동을 다녀왔다. 적당히 땀을 흘리고 돌아오는 길에, '운동도 잘 안되고, 언제까지 이렇게 헛돌아야할까' 생각하다가 내가 10대 시절 보았던 짤막한 글이 떠올랐다. 고2였나 고3이었나, 게임 제작자로 이름있었던 김학규라는 분의 개인 웹사이트에 올라왔던 짤막한 글이다. 




1. 몇달 전부터 드러밍을 진지하게 시작했음. 회사 근처에 있는 실용음악학원에 수강해서 한 5개월 다녔음. 학원은 일주일에 한시간씩 나가면서 1:1 레슨으로 처음엔 교재에 있는 진도대로 나가기 시작. 몇 주 배우다가 내가 원하는 드러밍이 그냥 뚱땅뚱땅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지하게 빠르고 복잡한 곡을 치고 싶어한다는 것을 강사가 알게 되자, 교재는 때려치고 기초 루디먼트 연습부터 시작. 루디먼트는 스네어 드럼 하나만 가지고 왼손 오른손의 스트로크만 이용해서 치는 연주법. 가장 기본적이지만 그만큼 숙달이 필요한 분야.


2. 처음에는 강사가 더블스트로크를 가르치기 시작했음. 거의 200bpm넘는 속도로 더블스트로크를 치는 것을 보고 거의 묘기를 보는 느낌이었는데 나한테 이걸 하라고 시킴. 당연히 못 함. 못해도 올때마다 계속 더블스트로크를 시킴. 잘 하지도 못하는걸 계속 시키니까 답답하긴 했는데 오기가 생겨서 계속 하기 시작.


3. 한 3달쯤 하다보니까 어? 혹시 나도 이제 더블이 되기 시작하는건가? 하고 감이 오기 시작. 그러다가 더블스트로크를 알기쉽게 설명한 RudimentMania 김동재 님의 강의 영상을 보게 됨


4. 내가 드럼을 빠르고 복잡하고 정확하게 못 치는 근본 이유는 근육이 모자라서 그런 것이었구나라고 이해하게 됨. 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손목과 팔뚝의 근육이 따로 있고 평소에는 쓸일이 없으므로 초보자와 숙련자의 큰 차이가 생김


5. 메트로놈과 연습용패드를 구입해서 단련시작. 음악연습이건 운동연습이건 뭐건간에 반복을 통한 숙달은 근본적으로 'Muscle Memory'를 발달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체감함. 


6. 빠르게 치기 위해서는 먼저 천천히 정확하게 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됨. 메트로놈을 이용해서 느린 속도부터 정확하게 싱글스트로크, 더블스트로크, 패러디들, 한손 스트로크등을 꾸준히 연습하니 점점 속도가 올라감. 예전 연습을 시작했을때와 지금의 내 팔이 달라지고 있음을 체감


7. Muscle Memory라고 해서 정말 팔근육 안에 뇌세포가 있을리는 없고, 결국 뇌의 잘 쓰지 않던 일부분을 쓰게 되는 것인데, 평소 안하던 일을 반복해서 하고 있으니까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


8. 뇌를 쓰는 것도 근육을 단련하는 것과 마찬가지라서 한가지 분야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게 되면 그쪽에 관련된 뉴런과 시냅스만 발달하게 됨.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좋지만 넓게 생각하기는 어려워짐. 마치 잔디밭에 한번 사람들이 지나가서 길이 생기기 시작하면 계속 그쪽 길만 넓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



9. 뇌의 특정부분만 쓰는 것이 너무 심해지면 강박관념에 빠지기 쉬움. 무슨 생각을 해도 자꾸 한쪽으로 쏠려지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됨. 마치 볼링장 레인의 양 사이드에 있는 구렁텅이가 레인 한가운데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게 되는 것처럼 모든 생각이 그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함


10. 창의적인 생각을 하려면 그런 강박적 상태에서 벗어나야 함. 산책이나 드라이브등 뇌를 휴식모드로 두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요즘에 드럼연습을 해보니 이것도 뇌의 관심을 돌리는 데에 효과가 있는 것 같음. 특히 stick control 같은 교재를 보면서 메트로놈을 세트하고 연습을 하게 되면 머리가 많이 클리어 되는 느낌


12. 살면서 창의성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머릿속에 뜬금없는 것들을 자꾸 입력시켜줘야 함. 탁구나 드럼, 중국어 같이 별 관련이 없는 것들을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좋은 것 같음




'당연히 못함'


한창 힘들던 시절, 이글을 보고, 당연히 못한다라는 말의 순순함이 왜그리 뼈저리게 다가왔던지. 


어떤 울림이 있었다. 잘해야했고, 잘 못해서 괴로웠는데. 내 머릿속 기대치는 당연히 120%를 요구할 때, 기본 100%도 하지 못해 시궁창을 뒹굴 때가 기억이 났다. 많이 괴로웠다. 그러다 보았던 이 글의 '당연히 못함' 이라는, 아주 당연하듯 덤덤히 말하는 어조가 나에게 참 위로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 누구나 처음은 있고, 처음엔 당연히 못한다. 


능력의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처음은 있고, 처음엔 누구나 못한다. 일정 수준을 지나 기초를 때고나면 그때부터는 저위에 나오는 '근육'의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 듯 하다. 


두서 없이 썼는데. 


긁어온 글은 결론적으로, 창의적인 일을 해야할 때, 하던 일도 중요하지만 주기적으로 다른 일을 입력시키며 환기하고 숙련시켜보는 과정도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최근, 잡생각과 불안함, 초조함에 빠져 굉장히 크게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문득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운동 나갔다가 이 이야기가 왜 떠올랐을까. 




못하는 순간도 있을 것이다. 주저앉기보다 다음을 준비하는 자세와 태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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