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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체 May 06. 2021

멋지지 않은 하루살이

My dear enemy

다른 사람으로 딱 하루만 살아볼 수 있으면 어떨 거 같아?


우리 셋은 가끔 와인을 마신다. 셋 모두 술은 좋아하는데 술이 약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셋이 모여서 마시는 술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실시간으로 서로 취해가는 걸 구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친구의 자취방에서 와인을 마시던 중에 한 명이 갑작스레 화두를 던졌다. 우리는 이런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한다.


누군지 고를 수 있는 거야?


카프레제를 우물대면서 다른 친구가 말했다. 고를 수 있다면 일론 머스크나 워런 버핏으로 살면서 재산의 일부를 본인에게 증여하고 싶다고. 그게 아니라면 딱히 남의 삶을 하루 체험하는 건 그다지 매력적이진 않을 것 같단다. 너는 어떨 것 같냐기에 잠시 고민을 해봤다. 돈도 좋지만 어차피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을 거, 상실감만 커질 것 같아 일론 머스크는 포기하기로 했다. 안녕. 화성엔 꼭 가주세요.




다른 이의 삶을 하루 살아볼 수 있다면, 이라는 질문에 대답하려면 아무래도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는 과정이 필연적이다. 역사적인 인물도 있겠고 현존하는 인물도 있겠으나 그런 일련의 과정들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나의 편견이나 가치관이 개입되게 되는데, 내가 뭐라고 그런 평가를 내리나 싶은 마음에 나는 실존하지 않았던 사람에 마음이 동한다.


나는 조병운.

누군데 그게?

영화 멋진 하루에 나와.


영화 '멋진 하루'는 동명의 일본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이별한 지 1년 만에 만난 희수와 병운의 이야기다. 두 사람이 아직 연인이었을 때, 병운은 희수에게 350만 원을 빌렸고, 상환하지 않은 채로 헤어졌다. 그리고 1년 뒤, 경마장에 있던 병운을 갑자기 찾아온 희수가 상환을 요구한다. 그런데 병운에게는 당장 350만 원이 없다. 며칠 내로 갚아주겠노라 말하는 병운에게 희수는 오늘 안에 갚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야기를 해, 병운은 돈을 빌리러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게 되고, 두 사람이 함께 돈을 받으러 다닌다는 내용이다.


빚쟁이잖아?  살아보고 싶다는 거야?

 죽어도 저렇게는 못   같아서.


죽어도 저렇게는 못 살 것 같다는 말은 진심이다. 만약 그런 게 내 실제 삶이라면 그야말로 끔찍할 테니까. 돈한 푼 없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빚으로 쫓기는 삶이란, 상상만으로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그런데 그 와중에 성격 좋게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능청을 떠는 모습은 절대로 내가 가질 수 없는 성격이다. 나는 꽁한 구석이 있는 데다, 얼굴이 껌종이 은박지보다 얇은 사람이라서.




영화에서 희수는 돈을 핑계로 병운을 찾아왔지만 정말 돈 때문에 찾아온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같이 돈을 받으러 다니면서, 희수의 감정선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마도 희수가 병운에게 바랐던 건 위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본인도 그걸 깨닫고 있지는 못했지만. 희수에게 찾아왔던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어쩌다 자신의 삶이 이 지경이 됐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병운이 떠오른 희수. 돈이 없다고 하면 그냥 욕이나 실컷 하고 치워버리려고 했었는데, 어느새 자신의 기억에 담긴 병운과, 다시 만난 병운이 다르더라는 것을 깨달은 희수가, 병운에 대한 오해들을 푸는 동안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고 위로를 받는다.


병운은 망가진 걸 고치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그저 한심하기만 했던 병운의 삶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내 삶을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의 삶이 정말 막장이었다면 십시일반으로 돈을 빌릴 주변인조차도 없었겠지. 나는 누군가에게 하루 만에 350만 원을 빌릴 수 있을까 생각하며 아무리 휴대폰 전화번호부를 뒤적여보고 인스타 피드를 뒤적여봐도, 돈은 커녕 편하게 밥 먹자고 연락할 만큼의 지인도 나에게는 없었다. 


너네 나한테 350 빌려줄 수 있어?

350원?

...와인이나 더 마시자.


그럼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도 좋은 삶을 살고 있을까. 병운이라면, 자기가 잘 나가든 잘 나가지 않든 상대방에게 정말 진심 어린 위로를 해주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니까 주변에 얼마든지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는 거겠지. 위로를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사실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닌데도, 이제는 내 선의가 무례로 비칠까 두렵다.


병운의 삶은 그다지 평화롭지는 않지만, 진정으로 평온해 보였다. 그런 평온함이 내게 찾아올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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