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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체 May 18. 2021

스트레스 해소법

How much do I know about myself?

청소년 시기의 나는 상당히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이었다. 상처 받기는 쉬웠는데 아물기는 어려웠다. 사춘기라는 특성을 감안하고서라도 유난히 물렀던 아이라서 늘 가시를 세우고 살아왔다. 꼭 복어 같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물려 죽을 거라면 나 혼자는 안 죽겠다며 악다구니를 썼다. 누가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몸집을 크게 부풀려서 먼저 화를 냈다. 그러지 않으면 나약해 보일까 봐 겁이 났거든. 나는 나약하지 않다고, 나에게 못되게 대하면 너에게도 결코 좋은 결과가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든 보이려 노력했다. 그게 오히려 나의 나약한 내면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일이라는 걸 그땐 몰랐지.


그런 탓에 중학교 시절부터 신경성 위궤양과 장염을 달고 살았다. 언제나 병원에 찾아갈 때면 의사에게서 '스트레스받지 마시고요'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건지, 당신은 정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지 묻고 싶었다. 그렇게 학창 시절을 다 흘려보내고 조금의 변화도 없이 점점 더 날카로워져만 갔다. 예민함은 잘 벼려진 칼과 같아서 주변인을 해치고 나를 해쳤다. 누군가를 자꾸만 해치는 내가 싫었고 그건 결국 자기혐오에 귀결되었다. 그 무렵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대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걸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 나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결국에 제 화를 못 이겨서 배를 부풀리고 까드득 까드득 소리를 내다가 배가 뻥 터져서 죽은 복어처럼, 나의 죽음은 일말의 동정도 받지 못하고 비웃음거리가 될 것 같았다. 어두컴컴한 심연의 끝에서 나는 어떻게든 빛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내면의 평화를 찾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는 역설적인 간절함을 가지고, 끈질기게. 평화를 찾는 방법은 몰랐지만, 그걸 내가 간절히 원한다는 것만은 알았다. 더 이상 복어가 되지 않고도 나를 방어할 수 있는, 오롯이 나의 내면을 위한 평화.


그러다가 어느 책을 통해서, 명상이라는 걸 알게 됐다. 이전까지 명상에 대해서라면 인도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나, 절에서 스님들이나 하는 거라는 이미지가 있어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졌고 어렵게만 생각됐었다. 그런데 사실 명상이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라, 단순히 호흡에 집중하고 머리를 쉬게 해주는 거라는 걸 배웠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문제가 내 안에 있다는 명제가, 나에게 이상하리만치 절절하게 와 닿았다. 과거에는 오히려 그런 생각들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나약한 자기 연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왜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모든 문제가 내 안에 있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명상을 하면서,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그걸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라는 존재는 감정의 주인이므로, 내가 곧 감정인 것은 아닌 것이다.


어차피 나의 바깥에서는 끊임없는 자극이 들어온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그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건 외부를 향해 변화를 요구하려는 외침이 아니라 내면을 향하는 대화인 것이다. 남들에게 이러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올, 수많은 변수들을 다스리고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줄 방법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니, 비로소 속 시끄럽지 않은 나날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줄곧 명상을 한다. 지금도 완전히 내 감정을 객관화시켜서 바라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스트레스를 덜 받고 살아갈 수 있게 됐다. 그러면서 이전보다도 나 스스로와 대단히 친해진 나를 발견했다. 나를 사랑할 수 없던 내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려 노력했던 지난 세월들이 무상하다. 지금도 나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내 감정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에 관해서. 나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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