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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Apr 04. 2024

유언장에 고양이를 포함시키기

캔따개가 없더라도 안전하기를


 우리집 냥이들은 집에 온 지 1년 넘게 집사들을 피한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캣타워 맨 아래칸에 후다닥 숨기 바쁘다. 가까이 다가서면 ”하악~“ 하는 위협 & 경계음을 아직도 내고. 하지만 신기하게 간식을 주는 시간이 되면 문지방에 눌러앉아 기다리거나, 보란 듯이 주위를 맴돈다. 먹고사는 문제는 집사 네가 좋고 싫고와는 별개라는 듯이.

 자기들 필요할 때만 밥주는 이를 찾는데도 탈없이 먹고살다니. 너무 능력 있는 녀석들이다.


 처음 구조한 길고양이 뽀와 함께할, 둘째를 찾아 헤매던 시기가 떠오른다. 당시 평택시 동물보호센터 홈페이지에 고독사한 노인의 집에서 구출된 고양이들이 올라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세 마리였나? 네 명이었나. 동물에게만 붙는 '~마리'같은 말은 이들을 인간과 차별하고 덜 소중히 대하는 느낌이 들어서 부러 '명'이라 불러본다. 바퀴벌레, 모기, 들쥐, 그리마 같은 존재들조차 생명으로만 따지자면 그 고귀함은 같지 않을까.


 한 명씩 차례로 업데이트되는 노인의 고양이들을 보고 남편은 예쁘다며 보러 가자고 했다. 다쳐서 죽을 뻔한 고양이를 애써 살려놓은 때라 그랬는지 죽음 자체가 솔직히 꺼림칙했다. 노인의 주검을 곁에 두고 며칠 동안 생활해야 했을 아이들의 두려움, 아무도 모르게 죽은 노인의 애환과 안타까움이 볼 때마다 떠오를 것 같았다. 그가 생을 하직하자마자 또는 그전에 녀석들을 누가 구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독거노인은 고양이들에 대한 유언은 남기지 않았던 것 같다.


 다양한 위험에 노출되어 평균 3~5년밖에 살지 못하는 길고양이와 달리 집고양이는 20살까지도 사는 세상. 그럼에도 인간인 내가 고양이보다 오래 살 확률은 여전히 높다. 혹시라도 불의의 사고로 내가 다치거나 죽게 된다면 우리집 겁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일하면서도 캠으로 아이들이 잘 노는지, 혹은 잘 자는지 확인하며 워킹맘의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겨진 아이들을 두고 하늘로 떠나는 엄마의 마음으로 고양이들에 대한 유언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집사 1호와 2호인 남편과 내가 거의 동시에 죽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지. 현재 나이나 건강 상태와 무관하게 사람은 언제든 갑자기 다치거나 사망할 수 있으니까.

 

 한 치 앞을 보지 못해도 계획을 세울 수는 있는

게 사람이다. 계획, 혹은 목표를 세울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떠올린다. 만약 어떤 목표는 달성되었는데 어떤 것은 그렇지 못하다면 누구를 위해, 어떤 동기에서 꼭 이루고 싶은 계획이었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부재시 집에 고양이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반려동물(고양이)과 함께 살고 있어요."라는 표시를 하고, "위급상황시 고양이들도 구해주세요"라고 현관에 써붙이면 어떨까 생각한다.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이런 종류의 명패를 만들어 판매하는 곳도 다행히 있다. 역시 나만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구나! 몇 년전부터 써서 가끔 업데이트하는 유언장에 이들에 대한 거취를 표명해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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