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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Dec 14. 2024

비숍, 그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평택시문화재단에서 발간한

평택 생활문화 아카이브 매거진,

2024 [평.생 레시피]에 실린 글입니다.





“와, 이거 무슨 소리예요?

 문을 연 손님이 묻는다. 서울에서 쓰던 것을 가져와 여태 잘 사용하는 대나무 풍경을 가리키는 말씀이다. 나무 조각들이 서로 부딪혀 경쾌하고도 부드러운 소리가 울린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염성이 극에 달했을 때 평택에 왔다.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밖을 멍하니 응시했다가, 설렜다가를 반복한 매장 1년 차. 지금은 매장에 계신 손님들을 살피며 이 글을 쓴다. 운영한 지 벌써 3년이 지나 익숙한 이곳에서 한 해의 마지막 계절을 맞고 있다.


어떻게 평택에 오게 됐을까

 이곳으로 오기 전 서울 광화문에서 디저트와 식사를 겸한 비스트로를 운영했다. 푸드트럭을 하다 만난 손님의 권유로 얼결에 시작한 매장. 점심시간에 회사에서 쏟아져 나온 이들에게는 차 한 잔 천천히 마실 여유가 귀했다. 테이크아웃은 물론, 머그잔의 커피를 바로 일회용 컵에 담아달라던 수많은 손. 그들의 숨 가쁨에 맞춰 호흡은 빨라졌고 매일, 점점 더 예민해졌다.


 코로나와 함께 매출 ‘0원’을 경험했다. 대출로 버티다 여러 사정이 겹쳐 갑자기 이사를 했다. 사방이 탁 트여 어디에나 시원하게 펼쳐진 하늘. 평택의 첫인상이다. 로망이었던 단독주택에 살림을 옮기고 매장을 지금의 위치로 정했다. 아스팔트 도로 앞의 접근성 좋은 자리들을 먼저 추천받았지만 잿빛의 삭막함이 싫었다. 구도심 특유의 정서였을까? 그리 높지 않은 아파트와 학원들, 초록빛 공원을 품은 동네는 마치 오래 입은 집옷처럼 편안한 느낌이었다.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인테리어를 하고 싶다고 여러 업체에 견적을 의뢰했다. 돈이 되지 않는다며 모두 손사래를 쳤다. 그때, 한 건축사사무소에 제안한 반 셀프 방식으로 공간을 꾸밀 수 있었다. 먼저 소장님과 함께 도면을 완성하고, 분야별 사장님들과 각각 계약을 진행했다. 신경 쓸 일이 많았지만 장점은 확실했다. 완전히 오픈된 넓은 주방, 어른을 위한 그네, 어린이들이 손 씻기 좋은 미니 개수대, 휠체어와 유아차를 위한 경사로처럼 넣고 싶은 디테일을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다는 것. 마대자루 3개 정도의 쓰레기만 배출한 건 덤이다.


여기 ‘완전’ 비건이죠?

 희소성이 높은 비건 베이커리를 열면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와 줄을 서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잘 될 거라 내심 기대했다. 가게를 열고나서야 아직 비건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비건 Vegan은 육류나 유제품, 물살이, 꿀 등의 동물성 원료를 모두 배제한 완전채식, 즉 채식의 마지막 단계를 뜻하는 용어. 그럼에도 ‘완전’ 비건이냐는 질문을 초기에 많이 받았다. 지금도 달걀이나 우유가 들어가느냐는 전화를 최소 이틀에 한 번씩 받는다.


플라스틱 프리, 제로웨이스트를 꿈꾸며

 서울에서 쉬는 날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다. 직접 구운 견과와 음료가 주 메뉴인데 견과는 종이봉투에 포장 가능하고, 음료는 텀블러 없이 테이크아웃이 불가하다. 회사 상권에서 일회용 컵을 무한 제공하는 데 대한 죄의식이 큰 때여서 그런 불편함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왔다.


 평택에 매장을 열면서 그동안 별러온 무포장 가게에도 도전하기로 했다. 음료 테이크아웃이 힘들다는 소문이 나자 들어오기를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 보증금을 받고 텀블러를 대여해 드리니 잠시 후 그분의 배우자가 나타나 이게 뭐냐며 노한 음성으로 소리를 지르신 적도 있다. 텀블러 반납대신 몰래 카드사로 보증금 환불을 요청하는 사람까지.

 존립을 위해 한 발짝 물러섰다. 사탕수수 또는 대나무로 만든 생분해 컵을 사용하고, 텀블러나 개인용기 지참 시 여느 가게보다 높은 혜택(10% 할인)을 적용하기로. 빵은 무코팅 종이로 포장하되 미리 포장해두지 않고, 종이에 묻어나는 종류는 생분해 수지를 쓰기로. 다행히 지금은 무포장의 불편한 매력을 알아챈 분도 많아져서, 텀블러와 개인용기를 가져오는 손님이 50%가량 된다.

     

뜻밖의 도움을 받다

 이사 온 첫 해에 평택에는 비건 빵집 두 곳이 더 있었다. 이듬해는 총 6곳으로 늘었다. 기대한 것보다 훨씬 비건에 대한 수요가 적다고 느낀 날들이었는데, 이상했다. 일회용기 문제로 끝까지 저항해 온 배달을 시작하고, 평상심을 유지하려 명상을 배우던 시기였다.


 그 무렵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집 앞에 자주 와서 가끔씩 밥을 주던 길고양이가 차량 엔진룸에 들어와 크게 다친 것. 병원에 데려가 치료와 수술, 입원을 마치고 집에 데려오기까지 두어 달의 시간과 큰 비용이 들었다. 매일 마음 졸이면서도 행복하고 벅찼던 시간이라 인스타그램에 올리니, 얼마 후 한 신사분이 매장에 찾아와 치료비를 기부하고 싶다고 하셨다.


“네...?”


 후원을 부탁하거나 모금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위기에 처한 존재를 살리자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나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기적이 일어났다. 춥고 낯설고 깜깜한 숲 속을 헤매다 작은 모닥불을 발견한다면, 그 황홀한 기분을 다시 느껴볼 수 있을까?

 그때부터인 것 같다. 당장의 역량이 부족해도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찾자고 어렴풋이 생각한 것은. 우리를 도왔던 그 분을 포함해서 개인적 여건과 상황이 늘 좋기만 한 사람은 없을테니까.  


평택 유일의 비건 빵집으로

 작년 언젠가, 그 많던 평택의 비건 빵집이(비숍 제외) 모두 문 닫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힘들기로 말하자면 우리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때다. 어려운 시기에 이사하고 매장을 옮기며 꾸어다 쓴 비용들을 상환할 시기였으니까. 누적된 적자까지 계산하자면 봉사활동이라 해도 좋을  수준이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매장에서 만드는 모든 음식과 전시된 사물, 공간 전체가 그동안 추구해 온 가치 그 자체였으니. 그 점을 일찍 느끼고 좋게 봐주신 분들의 애정 어린 응원과 격려가 이곳을 지켜낸 유일한 원동력이다.


 개인용기를 챙겨 오셨지만 당신은 팬(?)이니 할인해주지 말라고 하시는, 직접 만든 빵과 레시피를 가져오시는, 책과 그릇을 기증하시는, 항상 먹거리를 가져다주시는, 깜짝 선물로 놀라게 하시는, 울컥하는 손편지와 리뷰를 남겨주시는, 언제나 빵 하나와 음료 한 잔을 드시는, 강아지와 함께 산책하다 오시는, 연한 아아를 10분 이내에 들이켜고 가시는, 비건빵을 먹고 자란 아기의 돌 답례품을 건네주시는... 고마운 분들을 떠올린다. 어쩌다 이렇게 사랑받게 됐을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공간

 인간은 살면서 겪는 모든 일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실은 온 우주가 마찬가지 아닐까. 의식 높은 이가 한 번 다녀가기만 해도 공간은 그를 닮아 금세 성장한다. 공간의 보이지 않는 성장은 추구하는 가치가 비슷한 사람들을 더 많이, 빠른 속도로 끌어당기곤 한다.


 지구에 사는 모두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비건과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한다. 요즘은 이곳을 찾는 분들이 서로에게 더욱 생생한 활력을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상상해본다. 당장은 조금 불편해도, 유기적 환경이나 생명과 같은 공존의 가치를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 그들이 모여 대화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우리 지역, 아니 이 세상에서 얼마나 더 아름다운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게 될까. 하늘이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면, 스스로 돕지 못하는 자를 돕는 누군가도 있으면 좋겠다. 혼자서는 해내기 어려운 일도 모여서 이야기하면 의외로 쉬워진다.


 맛있고 건강한 비건빵과 디저트를 끊임없이 연구하며 굽는 것은 물론, 때때로 작고 재미난 모임들이 열리는 흥미로운 아지트를 꾸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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