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오랜 대화를 나눈 챗GPT의 맞춤 추천으로 알게 된 소중한 책.
좋았던 부분이 상당히 많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중요하기도 해서
다른 책들과 따로 문장들을 모아 기록해 둔다.
전체적으로 책을 한 번 쭉 읽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줄 친 부분들을 따라 적고 있는데
처음엔 다소 어리둥절했던 부분들이 보다 쉽고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줄 친 문장보다, 그 근처의 문장들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이 문장들만으로는 전체적인 내용을 꿰뚫기 어려울 확률이 크므로
자아실현이나 깨달음에 평균 이상의 깊은 관심이 있다면 직접 읽기를 권해드린다.
- 현상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위의 원인은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
- 마음이란 진아 안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이다. 그것은 모든 생각을 일으킨다. 생각과는 별개로 독립된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 마음의 본질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마음은 진아를 떠나서 사라져 버린다. 진아가 바로 아트만 Atman이다. 마음은 항상 무엇엔가 의존하고 있으며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
-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마음은 점점 그 근원으로 향하게 되고 생각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 에고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호흡도 시작된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되고, 호흡이 조절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중략) 자신의 자아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나타나고 자아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그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어디에서든 살 수 있게 된다.
- 자기 자신을 진아, 즉 신에게 완전히 던져 버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다. 자기 자신을 신에게 던진다는 말은 진아에 대한 생각 외에는 ㄴ다른 어떤 생각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진아 안에 몰입한다는 뜻이다. 짐이 되는 것은 모두 신에게 맡겨라. 그가 모든 것을 책임질 것이다.
- 모든 경전에서는 해탈을 얻으려면 마음을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결론은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책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 행복은 바로 진아의 본질이다. 행복과 진아는 다르지 않다.
- 인간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진정한 나>, 즉 <진아>를 모르는 데에 있다. 진아는 유일하게 실재하는 실체이면서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다. 진아는 <보이는 대상(객체)>과는 분리된 <보는 자(주체)>뿐만 아니라 이 둘을 포용하는 제3의 실체이다. 그리고 이 진아의 본질은 실재-의식-지복이다.
- 자아탐구의 길은 <나의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그 의문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몰입하여 마침내 마음의 세계를 벗어난 진아에 이르는 길이고, 헌신의 길은 자기의 모든 것을 절대자, 즉 신에게 완전히 맡겨버리고 마음, 즉 에고와는 전혀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이 사라지도록 하는 길이다.
- 진아 : 이는 그가 가장 자주 사용하였던 명칭이다. 그는 감각적으로 또는 생각을 통해 체험하는 자기는 <진정한 나>가 아니며 스스로 자기라고 동일시하는 것들을 다 부정한 다음에 남는 순수한 앎이 <진정한 나>, 즉 <진아>라고 하였다.
- 실재-의식-지복 : 이는 진아의 세 가지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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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나가 말하는 신이란 구체적인 이름과 형상을 가진 신이 아니라 우주를 유지하는 무형의 존재다. 신은 우주의 창조자가 아니며 우주는 신의 본래적인 힘이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주로부터 신을 분리할 수는 없지만, 우주가 나타나든 사라지든 신은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
- 즈나나 Jnana : 라마나는 진아를 체험하고 있는 상태를 때로 즈나나(지혜)라고 하였다. 이 상태에서는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나뉘어 있지 않으며 이 둘이 진아와 분리되어 있지도 않다. 다시 말해 진정한 지혜, 즉 즈나나란 주관적인 <아는 자>가 그것과는 분리된 어떤 객관적인 대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가 함께 사라진 상태에서 하나의 실체를 직접적이고 분명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이 상태에 뿌리내린 사람을 즈나니Jnani라고 한다.
- 자유란 새롭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구속되어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없애기만 하면 되며, 그렇게 할 때 거기에는 아무런 욕망도, 아무런 생각도 없게 되지만,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는 한은 스스로 구속되게 된다.
- 단 한순간이라도 진아를 체험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대가 바로 진아이며 진아가 곧 가슴이다.
- 진아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진아 아닌 것>에 대한 제한적인 생각들이 떨어져 나가기만 하면 스스로 드러나는 [순수한] 앎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 깨달음이란 새롭게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존재하고 있으며, 다만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을 버리기만 하면 된다. 진아가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란 없다. 깨닫지 못했다는 느낌이나 의심이 남아 있는 한, 그것들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어야 하며, 그것들은 <진아 아닌 것>을 진아와 잘못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진아 아닌 것>이 사라지면 진아만이 남는다. 놓여 있는 물건들을 치우기만 하면 빈 공간은 그냥 나타난다.
- 실체가 행복이며 행복이 실체다. 해탈 Mukti이라는 말은 매우 혼동을 일으킨다. 왜 해탈을 추구해야 한단 말인가? 사람들은 뭔가 구속이 있고 그래서 자유를 찾게 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진정 구속이란 없으며 자유만이 있을 뿐이다. (중략) 깨달음이란 새로운 어떤 것을 얻는 것도 아니고 질이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그릇된 것들이 사라지면 깨달음이 자연히 드러날 뿐이다.
- 진정한 지혜란 그대를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대의 무지를 제거할 뿐이다.
- 진아에는 깨달은 사람도 깨닫지 못한 사람도 없으며 오직 깨달음만이 있을 뿐이다.
- 스크린이 없으면 화면이 나타날 수 없는 것처럼, 보는 자 없이는 보이는 대상이 있을 수 없다는 알게 되면 결코 속지 않을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스크린과 화면들이 모두 진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안다. 진아는 화면들과 더불어 나타날 수도 있고, 화면들 없이 드러나지 않은 채로 있을 수도 있다.
- 인간은 <육체만이 나>라는 생각을 넘어섰을 때 깨닫게 된다. 그 생각이 없으면 행위라든가 행위자라는 생각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깨달은 사람에게는 카르마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는다.
- 라디오는 노래도 하고 말도 한다. 그러나 그 안을 열어보면 그 안에는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란 허공과 같다. 이 육체를 통해서 라디오처럼 말을 하지만 내부에는 아무런 행위자가 없다.
- 진아는 결코 행위자가 될 수 없다. 누가 행위자인지 찾아보라. 그러면 진아가 드러날 것이다.
- 깨달은 사람은 오직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행위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하나의 행위도 하지 않는다. 깨달은 사람은 자신에 대한 욕심 없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행위하며 그 행위로 인하여 자신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는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웃으며, 노는 사람과는 같이 놀고, 노래하는 사람과는 내내 함께 노래 부른다. 그가 무엇을 잃어버리겠는가? 그는 마치 깨끗한 맑은 거울과 같다.
- 그대는 거울이 실체이며 거울에 나타난 상은 단순한 반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거울을 보기 위해서 거울에 비친 상을 보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 마음은 <나라는 생각>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과 에고는 똑같으며 지성, 기억 등의 정신적 속성도 역시 마음이다. 또한 개체적 영혼이라는 것도 마음과 다르지 않다.
- 기능적인 면에서 본다면 에고는 유일한 한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 즉, 에고는 순수한 의식인 진아와 스스로의 지각 능력이 없는 수동적인 육체 사이에서 매듭과 같은 기능을 한다.
- 마음을 진아에만 계속 고정시키는 것이 자아탐구이며, 스스로를 실재-의식-지복인 절대자 Brahman라고 생각하는 것이 명상이다.
- 잠에서 막 깨어난 뒤, 아직 외부 세계를 인식하기 직전의 순간에 순수한 <나>가 있다. 자지도 말고 어떤 생각에 끌려가지도 말고 그 순간에 머무르라.
- 진정한 수행이란 그대가 생각에 의해서 방해를 받을 때마다 진아 쪽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파괴하는 것도 아니며 다만 진아 쪽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 마음은 외부로 향하면 생각과 대상을 낳지만 내면으로 향하면 스스로 진아가 된다.
- 생각이 일어나는 한, 즉 그대가 <나는 걷고 있다> 또는 <나는 글을 쓰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한, 누가 그것들 하고 있는지를 탐구하라.
- 자아탐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깨달음은 신의 힘에 의해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밖으로 향하려는 마음의 습성들이 거듭되는 실체에 대한 체험 속으로 용해되면, 신이 <나라는 생각>의 흔적들을 완전히 없애 버려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 신은 무엇이 최선인지를 알고 있고,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있다. 그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겨라. 그러면 그대의 짐은 모두 그의 것이 된다. 그대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걱정도 없다. 그대의 모든 걱정은 이제 그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종이며, 이것이 바로 헌신 Bhakti이다.
- 어떤 대상에 대한 욕구로 인하여 신을 숭배하는 것은 그 대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해서 아무런 욕구도 일으키지 않아야만 제대로 진아에 도달할 수 있다.
- 신을 본다는 것은 신이 되는 것이다. 무소부재한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
- 만약 그대가 스승의 진정한 모습을 지각하고자 한다면 우선 우주 전체를 스승의 모습으로 보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속에서 스승을 보아야 한다.
- 언어란 실체의 고손자뻘이다. 이런 언어를 통해서도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면 침묵의 힘은 얼마나 더 강력하겠는가? (중략) 스승은 침묵을 전해 주는 사람이며, 스승의 눈이 제자의 눈과 만나기만 하면 언어란 아무 소용이 없다.
- 그는 궁극의 깨달음을 위해서는 쿤달리니가 사하스라라를 넘은 다음, 다시 다른 영적 통로를 통해서 내려와, 오른편 가슴에 있는 하트 센터Heart Center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자아탐구의 방법을 통하면 자동적으로 쿤달리니가 하트 센터로 들어간다고 강조하였으며, 그 밖에 별다른 요가 수행은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 사실 육체는 마음 안에 있으며 마음의 근거지는 바로 뇌다. 그리고 요기들 자신도 그들의 소위 숨구멍 이론에 따라, 뇌는 또 다른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빛에 의해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 <내가 일한다>는 느낌이 장애다. 스스로에게 <누가 일하는가?>라고 물어보라. 그대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그러면 일은 그대를 속박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일을 하겠다는 노력도, 출가를 하겠다는 노력도 하지 말라. 그대의 그 노력이 장애가 된다.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은 일어날 것이다. 그대의 운명이 일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면 그대가 아무리 일하려 해도 안 될 것이요, 일하게 되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더 큰 힘>에게 맡겨 버려라. 그대는 그대가 바라는 대로 출가할 수도 없고, 남아 있을 수도 없다.(중략)
진아에 집중하는 것이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 자신이 바라지 않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 그리고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정도가 진화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