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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산 Jan 28. 2020

아인슈타인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_첫번째 이야기

고산의 과학 에세이

1945년과 아인슈타인          


1945년, 동아시아를 제국주의 시험무대로 삼았던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모든 군을 철수시킨다. 그들이 바라던 상황은 물론 아니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는 인류의 미래에 새로운 길을 제시할 중요한 무기가 있었다. 

일본은 20세기 초, 조선을 거쳐 중국과 필리핀 등 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일본의 세력 확장은 멈추지 않고 결국 태평양을 건너 미국까지 전쟁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1945년 8월 6일 한 사건으로 결정되었다. 그들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날로 세계 역사에서도 중요한 날이었다. 


그날 이른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태평양의 한 섬에 있는 미군 비행단 기지에서 "e에놀라 게이"f라는 폭격기가 원자폭탄을 싣고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도착할 즈음 그 도시민들은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른 아침의 활기는 한순간 끔찍한 비극으로 바뀌었다. 엄청난 열과 빛, 폭풍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그 무기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 오랜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과학을 옳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할 경우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폭탄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모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부상을 당했다. 방사능에 오염된 물을 마신 이들은 심각한 중독 증상으로 불구가 되었다. 후유증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식과 손자 대까지 기형과 소아 사망으로 이어졌다.


히로시마에 리틀 보이(꼬마)를, 나가사키에 팻맨(뚱보)이라는 핵폭탄을 떨어뜨린 미국은 이들의 희생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승리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경고했다. 


“전쟁은 이겼다. 그러나 평화는 잃었다.”


과학의 힘으로 전쟁의 승리를 맛본 미국은 뒤이어 이 원자폭탄의 1,000배의 폭발력을 가진 수소폭탄까지 개발했다. 그리고 이 기술은 고스란히 구소련으로 흘러들어갔다. 이후 냉전을 이끌고 있던 두 강대국은 경쟁적으로 무기 개발에 앞장섰다. 

과정을 지켜본 세계는 전쟁이 끝나면서 평화가 찾아오리라는 희망은커녕 무시무시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다.

인류를 자칫 멸망으로 이끌 수도 있는 비약적인 무기의 발전은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적 성과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를 대표하는 공식이 바로 E=mc2이다.


E=mc2이라는 공식은 오늘날 너무도 유명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만, 이 공식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뜻밖에 드물다. 이 아인슈타인의 공식은 인류에게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E=mc2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만 해도 세상이 떠들썩할 정도로 화제가 되었고, 인간의 미래도 과거 그어느 시대보다 밝아 보였다. 원자물리학의 관점으로 볼 때, 모래알 하나만한 크기의 원료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는 화석연료인 석유와 석탄을 차지하기 위해 피 흘리며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에너지를 얻기 위한 핵분열이 가능해질 즈음 세계는 전쟁의 포화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바로 2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에너지가 아닌 당장 전쟁에서 사용 가능한 무기였다.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일본의 대동아정책은 동서양 모두를 긴 어둠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과학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존재할 수 없었고, 오로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민족주의와 인종주의가 인간 이성을 파멸로 이끌고 있었다. 아인슈타인 역시 이러한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온몸으로 전쟁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미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독일 출신의 과학자였지만 동시에 나치에 의해 희생당할 운명에 처한 유대인이기도 했다. 

당시 독일의 나치는 우생학이란 지금은 폐기된 이론을 이용해 ‘홀로코스트’라는 대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바로 우월한 아리안 족이 이끄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열등한 유대인과 집시들을 독가스로 학살한 것이다.

이러한 세계대전의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유럽 대륙 전체로 번지자 유대인 과학자들은 하나 둘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바탕으로 핵분열을 유도해낸 과학자 리제 마이트너도 있었다. 

당시 그들은 전쟁의 직접적인 포화에서 약간 비켜 서 있는 영국과 미국으로 옮겨와 그곳에 정착했다. 하지만 이들 피난민에 속해 있던 과학자들은 독일이나 독일의 영향 아래 있는 나라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최고 기밀로 다루어질 정도로 첨단 기술에 속했던 레이더 등의 연구는 할 수 없었다. 대신 이미 알려진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핵분열에 온 정열을 쏟아 부었다. 게다가 핵분열의 가능성은 리제 마이트너가 실험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이론에 대한 더 이상의 의심은 없었다. 

그들은 우라늄 핵이 분열하는 동안 발생하는 에너지를 다룰 수만 있다면 어떤 것보다도 강력한 무기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전쟁을 종식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을 자신들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무기가 가지게 될 두려운 위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이 공식 E=mc2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평화주의자로서 이 무기의 개발에 반대했지만 독일이 원자폭탄의 개발에 나서면서 더 이상 반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1939년 8월 아인슈타인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핵무기가 얼마나 위험하고 강력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편지에서 그는 핵분열을 이용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파괴적인 무기가 탄생할 수 있음을 대통령에게 경고하고 있다. 또한, 우수한 과학자들이 이미 떠나긴 했어도 여전히 독일에는 자신의 이론을 바탕으로 무기를 개발하려는 다른 과학자들이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도 독일보다 앞서 핵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결국, 일본에 의해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태평양 함대 사령부가 공격받은 이후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미국은 무기개발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굳이 핵무기를 제외하더라도 전쟁은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에 기여한 부분도 있다. 과학은 피를 마시고 성장한다는 비판이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두 차례의 전쟁으로 오늘날 전장에서 쓰이는 무기가 대부분 개발되었는데, 독가스와 같은 화학무기나 탱크, 레이더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기 연구는 미국의 경제적인 지원에 힘입은 원자폭탄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과학이론은 체계화되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초기 핵무기를 연구하던 물리학자들은 큰 벽에 부딪혔다. 보통 연구실에서 사용하던 우라늄은 핵분열 연구에 좋은 재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라늄과는 질량이 약간 다른 우라늄 동위원소 235가 핵분열에 더 좋은 재료였다. 문제는 우라늄 235가 흔한 물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상당수의 과학자는 핵분열을 이용한 무기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포기해 버린다.


그럼에도 핵무기 제조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연구해 나갔던 두 명의 과학자가 있었다. 바로 리제 마이트너의 조카인 오토 프리슈와 그의 동료 루돌프 파이얼스였다. 이들은 영국에 머물며 상대적으로 핵분열이 쉬운 우라늄 동위원소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들이 연구한 동위원소는 우라늄 원소의 성질을 갖고 있지만, 원자핵 안에 있는 중성자의 수가 달라 전체 질량에서 약간 차이가 나는 원소를 말한다. 

프리슈와 파이얼스의 연구는 보통의 우라늄에서 우라늄 동위원소 235를 분리해내는 것이었다. 대부분 과학자들이 포기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만약에 가능하다면 무기를 만드는 데는 단지 우라늄 235 몇 g만 있어도 되기 때문에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 이들의 연구는 영국에서 진행되었다. 점차 전쟁의 그늘이 영국으로까지 드리워지면서, 이들이 아무리 막대한 자본과 지대한 노력을 해도 지속적인 연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연구를 위한 새로운 공장이나 시설이 생기면 바로 독일 전투기의 폭격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1941년 12월 본격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면서, 이들 과학자는 연구를 계속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경고한 대로 독일에 남아 있는 과학자들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미국은 핵무기 개발사업인 "e맨해튼 프로젝트"f를 추진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적국인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에 맨해튼 프로젝트에는 직접 참여할 수 없었다. 


레슬리 그로브스라는 미군 장군이 사업의 책임을 졌고, 미국 ‘핵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과학자들을 불러 모으고 시설을 만드는 기술자들을 지휘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의 연구를 두 방향으로 나눠 진행했다. 

한쪽에서는 이론적인 토대를 만든 프리슈와 파이얼스를 중심으로 폭탄에 쓰일 우라늄 235를 분리하는 일을 했다. 다른 쪽에서는 원자로에서 중성자로 우라늄의 핵에 충격을 줘 새로운 원소인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일을 했다. 플루토늄 동위원소 239 역시 핵무기 재료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플루토늄을 제조하려고 했던 것은 그것만의 또 다른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라늄 동위원소들을 분리하는 것은 매우 복잡했지만, 플루토늄은 우라늄과는 다른 원소이기 때문에 화학적으로 우라늄으로부터 쉽게 분리해 낼 수 있었다. 


이렇게 막대한 돈과 인력을 쏟아부어 1945년 중반 최초의 핵무기가 탄생했다. 당시 투입된 돈은 1940년대 물가 수준으로 보면 수십억 달러에 달했고, 이 일에 매달린 사람만 해도 수십만 명이었다.

핵무기 개발이 완료되기 두 달 전, 유럽에서는 독일의 항복으로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을 맺었다. 1945년 5월이었다. 그렇다면 미국보다 앞서 시작된 독일의 핵무기 개발은 실패한 것일까? 그것은 좀 다른 문제였다. 독일은 초기에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지만, 영국과 미국이 두려워할 정도의 결과까지 가지 못했다. 그것은 독일을 지배하고 있던 나치의 지도자들이 원자폭탄 개발을 그리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들은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원자폭탄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당장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마무리 지을 무기가 더 급했고, 원자폭탄의 개발에 쓸 시간이나 돈도 넉넉지 않다고 생각했다. 결국, 원자력 에너지와 원자폭탄에 대한 개발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천천히 개발해도 늦지 않다고 본 것이다.


폭탄의 개발이 늦어지기는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최초의 원자폭탄은 미국의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1945년 7월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미국 뉴멕시코주 알라모 근처 사막에서 이뤄졌다. 실험 이후 미국은 일본에 항복을 하지 않을 경우 치르게 될 불행을 경고하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하지만 일본은 항복을 거부했다. 몇 주 후, 미국은 두 개의 원자폭탄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리고 만다. 미국이 다른 도시를 두고 히로시마를 선택한 것은 한 번도 폭격이 없었던 히로시마야말로 폭탄의 위력을 정확하게 수치화하기에 좋았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폭탄으로 수십만 명이 죽었다. 원자폭탄의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보고 놀란 일본은 며칠 후 항복했고, 이로써 2 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하지만 한 번 만들어진 이 무서운 무기는 사람들에게 큰 두려움이었다. 특히 구소련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실험에 연이어 성공하자 온 세계는 공포에 휩싸였다. 인류가 이루어 놓은 모든 문명이 무시무시한 핵무기 앞에서 재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모든 사람의 생각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사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원자폭탄까지의 진행과정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원자폭탄으로 연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그 엄청난 폭발력을 찾아내기까지는 원자물리학의 많은 업적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원자물리학의 발전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것은 폭탄 개발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원자폭탄은 개발되었다. 1896년 앙리 베크렐이 방사능을 발견한 이후 50년 만에 일어진 일이다. 

그럼에도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만든 물리학의 원죄를, 성서를 믿는 모든 사람이 짊어져야 할 태초의 원죄처럼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아인슈타인은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전 세계의 정부들과 국민에게 너무도 애타게 핵전쟁의 대재앙을 경고했다. "e러셀-아인슈타인 선언문"f은 가장 의미가 깊은 평화 운동의 하나였다. "e퍼그위시 운동"f이라 불리는 그 운동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더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데 많은 이바지를 하기도 했다. 특히 물리학자 요제프 로트블라트는 퍼그워시 운동에 40년의 시간을 바쳤다. 그는 그 공로로 1995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렇게 평화운동이야말로 아인슈타인의 숭고한 유산 가운데 가장 소중한 뜻을 담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중요한 기록들이 담긴 밀폐금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있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후세들을 위해 직접 적은 글이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의 우리 및 과거의 우리보다 더 정의롭지도 평화롭지도 이성적이지도 못하다면, 악마가 여러분을 잡아가버리길…. 

지극한 존경심을 담아, 이 경건한 소망을 들려드리는 저는 여러분의 알버트 아인슈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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