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05]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을 11월과 12월 총 2번 다녀왔다. 인파가 몰려 예약이 쉽지 않아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예약에 성공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어렵게 갈 수 있었던 만큼 기대도 컸는데 정말 기대한 만큼 만족스러운 전시였다. 무엇보다 상당한 작품들이 학교의 강의에서 배웠던 작품들이라 지나갈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이미지로만 보던 작품들을 실물로 보니 더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관람 시간이 한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어 개인적으로 작품 하나하나를 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 아쉬웠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느낀 것은 역시 그림은 실물로 볼 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나 생각들이 있고 이런 경험이 굉장히 소중하다는 점이었다. 기증된 작품들 중 50여점의 대표 작품이 전시되었고 20세기 초 이상범, 백남순 작가의 작품부터 천경자, 이성자 작가의 작품까지 20세기 초반에서 중반까지의 한국 근현대 미술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개인적으로 직접 그림과 마주 섰을 때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 4점을 선정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보려 한다.
먼저 전시실에 들어서면 백남순의 <낙원>과 이상범의 <무릉도원>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딱 그 모습을 보자마자 어쩌면 이것이 한국 현대 미술의 총체적인 역사, 방향, 또는 지향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적이고 토착적인 모습을 그린 이상범의 작품과 동양적 주제를 서양적으로 묘사한 백남순의 작품 사이에 서서 두 작품을 번갈아 보고 있으면 내가 마치 치열한 고민을 하던 당대 한국 화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다. 이처럼 물밀듯이 들어오는 서양의 것과 한국적인 것 사이에서 치열한 고민을 이어 나갔던 한국 현대 미술사 초반은 ‘수용과 변화’라는 주제로 전시가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서도 역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백남순의 <낙원>이었다. 전시실에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작품이었고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큰 사이즈에 색감이 굉장히 신비로워 한참을 바라보았다. 또한 ‘수용과 변화’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가장 직접적으로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 인상적인 작품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먼저 형식적인 면에서 봤을 때, 캔버스에 유채를 사용했으나 전통적인 병풍 형식을 취해 동양과 서양이 혼재된 느낌을 준다. 주제 면에서는 우리나라의 산수화인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국적인 소재도 함께 등장한다. 동양적인 험한 산세 속 나무들 중에는 야자수들도 이따금씩 보인다. 건물들 중에는 기와집, 오두막이 있는 동시에 교회 같아 보이는 서양식 건물이나 양옥도 세워져 있다. 그런 건물과 자연 사이에서 사람들은 여유롭게 거닐며 과일을 따고, 배를 타고 있다. 인물들도 자세히 보면 엄마와 아이가 향토적인 느낌을 자아내지만 금발의 여인이 있기도 하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물, 바위, 산과 같은 자연물의 형태는 동양의 산수화 느낌이 나지만 색채는 동양적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아마 유채를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이처럼 백남순이 그린 낙원은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백남순 작가는 일본에서 공부하고1928년에 파리로 유학을 떠났던 1세대 서양화가로 유화와 같은 서양의 소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이런 백남순 작가에게 낙원은 어쩌면 동양과 서양이 대립하지 않고 조화된 곳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다음으로 이인성의 <다알리아>을 보게 되었다. 이인성의 작품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배경에는 푸른 하늘에 밭이 보이고, 기와지붕 앞 담벼락 밑에는 빨간 장독대들이 늘어서 있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흰 천들 앞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만발한 다알리아 꽃과 우거진 가지들이 있다. 항상 향토색 논의에서 이인성의 작품은 향토적이고 한국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해석되었는데 놀랍게도 처음 이 작품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굉장히 이국적인데?’ 라는 생각이었다. 이전까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이인성의 작품은 토착적이고 원시적인, 즉 일본이 정의하고자 했던 한국적인 모습으로 해석되었는데 현대인인 내가 처음 봤을 때는 이국적이란 생각이 먼저 든 것이다. 이 작품의 첫 인상 덕분에 나는 전시장을 나와서도 이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인성이 작품을 제작하던 당시에는 다알리아와 풍경이 소위 ‘한국적’인 것이었지만 현대를 사는 나에게는 ‘이국적’인 모습이 되었다. 이는 곧 ‘한국적’, ‘이국적’의 의미가 이동하고 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작품 자체는 이인성이 <다알리아>를 그렸을 때부터 변형되지 않았지만 작품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바뀌고 시대도 바뀐다. 그러니 당시에는 한국적이라고 해석되었던 작품이 현대인인 나에게는 이국적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한국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2001년생인 나에게 한국은 장독대가 늘어져 있는 시골의 이미지보다 고층빌딩이 밀집된 도시의 이미지가 더 강하기 때문에 이인성의 이런 작품들을 보면 한국적이기보다 동남아의 필리핀, 태국과 같은 ‘이국적’인 이미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즉 이런 다알리아와 시골의 풍경은 나에게 ‘향토’가 아닌 것이다. 이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형태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고 우리도 똑같이 쓰고 있지만 그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의미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바뀐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작품을 보고 크게 감동하거나 영감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작품을 통해 중요한 것을 깨달았고 이것이 내 앞으로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꼭 글에 담고 싶었다.
다음은 김기창의 <군마도>였다. 화면을 통해 이미지를 봤을 때도 굉장히 역동적인 모습에 인상깊게 봤던 기억이 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스케일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내 눈높이에 말의 다리가 위치할 정도로 큰 네 폭 병풍의 작품을 보자 시야로 장악된다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여섯 마리 말이 뒤엉켜 있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든 의문은 ‘왜 이 말들이 이렇게나 역동적으로 보이는가’였다. 먼저 말갈기는 정말 바람에 휘날리는 것처럼 물결과 같이 야생적으로 표현되었고 말발굽과 다리 근육은 금방이라도 박차고 나갈 것 같은 모습으로 빠르고 역동적인 스케치로 표현했다. 또 말을 채색할 때에도 세밀하게 표현하기보다 과감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만 강렬하게 표현해 말이 정말 박차 나가는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려 한 것 같았다. 이런 그림의 요소 하나하나가 모여 실제로 역동적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말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확 들어왔던 것은 자기 속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또는 말들과 부딪히면서 넘어지는 오른쪽 하단의 말 한 마리였다. 말이 넘어지는 모습이 진짜처럼 느껴져서 더더욱 그 속도나 치열함이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이렇게 큰 화면에 생생한 표현이 함께하니 관객이 화면에 편입되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당시 김기창은 자신의 화풍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경향을 실험하던 중 이 작품을 그렸다. 그저 여러 시도 중에 하나임에도 이렇게나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그린 것을 보면 그는 엄청난 천재였음에는 틀림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는 청각을 잃었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금방이라도 말발굽 소리와 말의 울음소리가 들릴 것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감탄을 자아낼 수 밖에 없었다.
역시나 김환기의 <산울림>은 한번에 두 눈을 사로잡았다. 이 작품을 몰랐어도 작품 앞에 서게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분정도 남았을 때는 이 작품 앞의 벤치에 앉아 그 작품만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런 추상화들은 전시장에서 보고 있으면 가끔 ‘나도 하겠다’ 라는 말을 들을 때가 있어 참 씁쓸하다. 난 개인적으로 이런 작품을 볼 때 내가 이 작품을 만든다고 꼭 상상해보곤 한다. 몇 미터가 넘는 캔버스 앞에 서서 파란색과 검은색, 청록색 팔레트를 들고 하나씩 하나씩 캔버스를 채워간다. 수많은 사각형에 원을 채워 넣고 흰 색의 사각형은 채색을 하지 않고 남겨둘 것을 유의하며 안쪽의 세 원들을 빼곡히 채워나간다. 작가는 그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할까? 이 행위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은 절대 쉬운 일도 아니고 작가가 특정한 목적의식이나 어떤 강력한 의지가 없으면 절대 ‘나도 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구상 회화 작가들이 알아볼 수 있는 형상을 통해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면(몇몇 현대미술 사조들은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목적보다 행위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경우도 있으나) 추상 회화는 단지 수단이 알아볼 수 없는 형상일 뿐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관람객이 수용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더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이 작품에 부여한 산울림이란 제목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바라보면 마치 한 지점에서 시작하는 1/4의 원들은 산울림처럼 퍼져나가는 울림을 형상화한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원들이 서로 교차되고 채색되지 않은 흰 선이 원과 중첩되면서 작품은 더 오묘하고 무한한 공간에서 나에게 진동을 전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작품을 조금 더 멀리 서서 바라보면 작품 속 점들이 마치 우주의 별들처럼 느껴지며 비록 실제 우주는 진공 공간이지만 울림이 들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은 김환기 작가가 뉴욕 체류기에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며 완전 추상화에 도달했을 때 그린 그림이다. 이를 고려해 봤을 때 <산울림>은 자연에 대해 얘기하기도 하지만 ‘울림’이라는 제목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서정적인 추상화를 시도한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이는 김환기 작가가 계속해 한국적인 것을 찾으려는 시도 속에서 기하추상과는 구별되는 동양적인 추상화로 서정적이고 번지는 화면을 택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추상화의 매력은 이렇게 작가 또한 자신의 생각을 작품에 담기도 하지만 관객이 생각해보고 의미를 부여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작품들은 내가 그 작품을 직접 만든다 상상해보면 그 의미와 작가의 노력이 확 다가오면서 큰 인상을 주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너무 감명 깊게 봤던 작품이었다.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한시간 안에 봐야 하다 보니 작품 하나하나를 다 자세히 보지 못해 너무 아쉬웠다. 수업 시간에 배웠던 작품들을 다시 보니 너무 반갑고 더 오래 보고 싶었는데 제대로 보지 못한 작품들이 많아 아직도 아쉽다. 역시 전시를 보며 느낀 것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 수업을 듣지 못하고 전시를 보러 왔다면 눈으로만 보고 왔겠지만 작품들에 대해 배우고 나서 보니 수업 시간에 필기했던 내용이 떠오르며 풍부하게 전시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정말 뿌듯하고 기뻤다. 종강하고 나면 한번 더 가서 못봤던 작품을 제대로 다시 한 번 볼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한국 현대 미술은 배울수록 너무 재미있고 우리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보니 더욱 몰입해서 공부하게 된다. 전시를 통해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우고 생각하고 왔기 때문에 한국 현대 미술에 대해 더 깊게, 더 많이 공부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