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
Ep.02 _ Editor_김고운
전 세계 여성들의 로망을 대변했던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는 더 이상 화려한 싱글이 아니었다. 자신을 일하는 엄마가 아닌 남자로 봐달라는 펀드 매니저로, 딸아이가 다른 애들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트에서 구매한 사제 파이를 수제 파이로 둔갑시키는 두 아이의 엄마 케이트(사라 제시카 파커)가 되어있었다. 10년 전 화려한 싱글일 때 이 영화를 봤다면, 매 장면이 지금 내 일상과 오버랩되는 다큐멘터리 대신 로맨틱 코미디로 다가왔을까.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여자 넷이 모여 여성의 일과 육아에 대한 질문을 통해 서로의 경험과 관점을 나누었다. (영화 상) 2012년 미국 여성의 삶도 2022년을 살아가는 한국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씁쓸한 위로와 여전히 일상은 엉망일 테지만 “저는 시간이 안 됩니다(I am not available)”라고 당당히 직장에 말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과 함께, 케이트가 된 캐리가 앞으로 캐리가 될 미래의 케이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Q. 영화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이나 소감이 궁금해요.
지혜 : 워킹맘의 고충을 표현한 영화지만 연출과 스토리가 유쾌해서인지 무척 재미있게 봤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워킹맘 선배의 엉망진창인 삶을 보며 비출산을 지향하던 후배가 아이를 낳은 직후의 장면이에요. 선배에게 "이렇게 좋은 걸 왜 알려주지 않았냐"라며 울먹이죠. 저는 세 아이 모두 자연주의 출산을 했고 임신과 출산이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출산 후 삶의 충만함을 경험해서 인지 저도 항상 '이 경험을 어떻게 후배들에게 알려주지?'라는 생각을 했던 터라 이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은애 : 우선 이 영화가 개봉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제가 마주하는 현실과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서 놀라웠어요. 하필 미국 장기 출장 중에 이 영화를 보게 되어서, 출장 가는 주인공 케이트와 엄마를 배웅하는 아이들을 보며 더욱 감정 이입이 되었어요. 그리고 저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남편과 함께 ‘여전히 우리의 삶은 엉망이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둘이서 잘 헤쳐 나가 보자’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제가 남편과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혜나 : 영화 초반에 주인공이 사제 파이를 수제파이로 둔갑시키는 장면이 나와요. 선생님들의 시선이나, 딸이 유치원에서 느낄 감정들에 대해 걱정해서 무리하는 상황이 공감되었어요. 어린이집 코로나 확진자 발생으로 아이를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왜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지'라고 생각할 딸을 생각하니 맘이 아파 결국 데리러 간 일이 생각나더라고요.
고운 : 이 영화를 제가 미혼일 때 봤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잠깐 해봤어요. 제가 현재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어서 그런지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와닿았어요. 특히, 파이 장면에서 주인공이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고, 일하는 엄마라 내 아이가 다른 아이와 다르다고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 그리고 상사에게 아이가 있는 워킹맘이 아니라 그냥 남자로 대해 달라는 장면 대비 출장 일정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저는 평소 회사에서 아이 이야기를 자주 하는 편이고, 회사에 아이 때문에 이 부분은 어렵다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저는 제가 아이가 있는 일하는 여성임을 인정하고 그 상황을 알리고, 회사가 실망하더라도 내 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항상 컸거든요.
Q. 엄마가 되기 전과 엄마가 된 후에 ‘일’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있나요?
혜나 : 출산 후 경제적 활동과 저의 코어 밸류(core value)를 분리하게 되었어요. 지금 시기에는 양육에 집중하는 것이 저와 아이에게도 좋겠다는 것에 확신이 들어 순수한 경제적 활동으로써의 일을 하고 있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감사해요. 아이가 성장하고 나면 제 코어 밸류에 맞는 일을 하고 싶어요. 과연 예전처럼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불안할 때도 있지만, 워킹맘들이 일 때문에 육아에 대한 손해를 감수하는 것처럼 저 역시 반대로 육아를 위해서는 잠시 일에 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허락하는 내에서 브런치 기고나 엄마들을 위한 워크숍 등 저만의 사이드 활동을 지속하면서 그 불안감을 줄이려고 해요. 저는 지금이 만족스럽고 제 아이도 (그리고 곧 태어날 아이도) 일에 대해서 저처럼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은애 : 엄마가 되기 전에는 ‘돈을 벌기 위한 일’이어도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되고 나서는 무조건 ‘스스로가 만족하는 일’을 해야겠구나 싶어요. 일을 하면서 항상 따라다니는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덜어내는 건 결국 아이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닌 내가 좋아하고 만족하는 일이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혜 : 출산 전에는 경제적인 수익과 커리어를 잘 쌓는 것 만 생각했었는데, 출산 후에는 세상의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내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최소한 내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인지 일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진 것 같아요.
고운 : 저 역시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제가 좋아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해야겠단 생각이 커지더라고요. 아이 때문에 덜 재미있지만 양육하기에 좋은 환경으로 이직을 한 저로서는 원래 제 자신(나로서 아이덴디티)과 엄마라는 상황에 처한 저(엄마로서 아이덴디티)를 분리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는 것 같아요. 원래 내 속성대로라면 일에 대한 관점에 변화는 없지만, 아이가 주는 특별한 상황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 대신 다른 선택을 우선 고려하는 건 아닌지 말이죠. 예를 들면 여전히 저는 해외출장이 많은 일이 좋지만 아이 때문에 출장이 적은 일을 선택하고 있거든요.
지혜 : 엄마에 비해 아빠들은 ‘일을 그만두고 양육에 전념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깊게 하지는 않는 걸 보면 여전히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는 엄마에게 치중되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남편과 분야가 같은데 어떨 땐 왜 저만 이렇게 고민하는 건가 싶거든요. 특히, 엄마 아빠 연락처가 둘 다 있는데도 어린이집에서 엄마한테만 연락 오거나 어린이집에서 메시지를 받아도 남편은 답장할 생각이 없을 때요.
고운 : 제 일을 누구보다 지지해주고 양육에 적극적인 남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가 아프다거나 급한 불은 제 몫이에요. 한 번은 “너만 일하니? 나도 일하거든!”이라고 샤우팅 한 적도 있었죠.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최대한 동등하게 생각하고 그런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저는 육아휴직 중 직장이 지방 이전하게 되면서 이직하게 된 케이스인데, 그 당시 남편이 제 직장을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는 방안을 고려했고 실제로 직장도 알아봤었어요.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남편이 육아휴직이나 단축근무를 하기로 약속했고요. 가정마다 상황과 부부간 성향이 다르겠지만 매번 5:5로 동일하게 갈 수는 없고, 제가 바쁠 땐 남편이 양육에 더 신경을 쓰는 등 상황에 따라 무게중심이 옮겨지는 유연한 대처가 필요한 것 같아요. 한편으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왜 엄마들은 으레 먼저 내가 포기하고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원인이 모성애인지, 어릴 때부터 인식된 사회적 성역할인지, 개인의 성향인지 궁금해지네요. 대체 누가 우릴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은애 : 저희도 비교적 공평하게 분담하려고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는 커리어를 지키는 게 당연하고 육아휴직이 옵션인 반면, 저에게는 육아휴직이나 아이들 돌봄이 기본이고 커리어가 옵션인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제가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쏟아야 하는 에너지만큼, 남편은 가정을 돌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에너지가 그만큼 드는 것 같아요. 영화에서 주인공의 시어머니가 ‘우리 때는 남편은 경제적인 것을, 아내는 가정을 이렇게 둘 중에 하나만 책임지면 되는데, 너희들은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둘 다 책임을 져야 하지 않니.’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는데요, 때로는 옛날처럼 남녀 간 책임을 확실히 나누는 게 오히려 편했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해요.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여성의 역할이 많아진 것에 비해, 남성의 역할이 늘어나는 속도는 더딘 것처럼 느껴져요.
혜나 : 현재 제 상황에선 제 커리어는 좀 미루고 남편의 커리어에 더 힘을 실어주게 돼요. 남녀 차이라기보다는 개인 성향의 차이도 있다고 봐요. 영화에서 주인공의 남편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몸도 불편한데 안면 없는 할머니를 시터로 고용하고 일을 하러 건 거에 대해 주인공은 이해를 전혀 못하죠. 아내와 남편 중 육아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거슬리는 것이 좀 더 많은 사람이 결국 육아에 더 많이 참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커리어가 뒤로 미루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생물학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육아에 대한 기대치가 높게 태어날 확률이 크죠.
지혜 : 새로운 관점이네요. 그러고 보니 제 주변 남편들 중에도 육아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남편이 양육에 적극 관여하거나 육아를 전담하는 분들이 소수이지만 계시더라고요.
Q. 영화에서 케이트는 ‘앞으로 일과 가족 사이 줄다리기에서 손해를 보는 것은 남편이나 아이들이 아니라, 회사의 관계자들이나 고객일 것’이라고 말하죠. 동료나 나의 피고용인이 저렇게 이야기할 경우 과연 나는 쿨하게 넘길 수 있을까요?
은애 : 일과 가정 중 가정을 택하겠다고 선언한다면 고용주의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저도 고민되는 부분이에요. 회사에서 나에게 어떤 일을 맡겼는데 가정이 중요해서 못하겠단 말을 한다고 가정하면, 입장 바꿔서 생각했을 때 ‘과연 그런 사람에게 중요하고 급한 일을 맡길까?’ 싶은 거죠. 일적으로 좋은 기회가 있을 때 가정보단 일이 1순위인 사람을 고용주는 떠올리지 않을까란 생각에 ‘나는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까’라고 고민이 들 때가 있어요.
지혜 : 면접관의 입장이었을 때 저 역시 남성 지원자에게는 결혼 유무나 출산 계획을 물어보지 않았지만 여성 지원자들에게는 필수적으로 물어보게 되더라고요. 아이러니하게도 피고용인의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쿨하게 넘기지 못하는 거죠. 제 상황에 대입해보자면, 저도 아이에게 미안한 것보다 직장이나 동료들에게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는 미안함 때문에 퇴사를 결심한 부분도 있었던 것 같아요.
고운 : 저는 본인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출산 후 만난 상사들 역시 워킹맘 선배들이라 아이에 대한 일은 감사하게도 최우선 순위로 이해해주셨고, 일도 중요하지만 아이를 먼저 챙기란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때론 일보단 가정이 먼저인 선택을 할 수 있었고, 그만큼 제 스스로 직장에서 제 몫을 하려고 더 노력했어요. 제가 이런 혜택(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을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 역시 후배가 동일한 상황에 처한다면 허용해주고 싶어요. 여성 또는 양육자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아지는 것이, 그 선택의 주체가 되는 것이 “일터의 다양성과 포용성”이라고 생각해요.
지혜 : 나 스스로 또는 한 명이 다른 경험을 하고 바뀌기 시작하면, 그 경험을 한 후배도 다음 후배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겠단 생각에 조금은 희망적이라고 느껴지네요.
혜나 : FM인 저의 캐릭터를 생각한다면 저는 쿨하지 못할 것 같아요.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회사가 직원의 육아와 관련된 상황을 이해하고 책임져 줄 필요는 없다고 봐요. 그래도 주인공이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생각한 건 케이트가 자신의 가족을 한번 희생해서 본인의 능력을 증명해낸 후 상사에게 ‘아니요’라고 말했다는 점이에요. 현실에서도 양육이라는 핸디캡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직원에게 있다는 것을 회사가 안다면 그 직원이 ‘나는 가족이 더 우선이야’라고 했을 때 받아들이는 시선이 다르지 않을까요. 결국 개인이 증명해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Q. 일 할 때의 나와 육아할 때의 나, 어느 쪽이 조금 더 즐거운가요?
혜나 : 어떤 날은 즐겁다가 어떤 날은 즐겁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 기준이 뭔지 생각해보면 그 차이는 ‘자기 효능감’인 것 같아요. 일과 육아 중 선택하는 것보다 ‘자기 효능감’을 내가 어디서 더 느끼는지,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다른 것 같아요.
지혜 :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굳이 꼽자면 ‘일할 때의 나’인 것 같아요. 경제활동이 아니더라도 내가 무언가 하고 싶거나 하던 일이 잘되면 아이와의 시간도 더 즐겁거든요. 육퇴 후에 나만의 시간을 갖고 나면 다음날 아이에게도 좀 더 애정이 가더라고요.
은애 : 저도 ‘일할 때의 나’의 비율이 8:2로 큰 것 같아요. 저는 전업 엄마를 보며 자랐는데요, 제가 받은 만큼 아이에게 해줄 수 없겠다는 사실에 첫째 아이 출산 후 육아휴직 때 많은 고민을 했었어요. 그런데 둘째 출산 후 두 번째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 나는 전업 엄마는 못하겠구나’라는 걸 확실히 알겠더라고요. 일 할 때의 제가 좋고, 일 하는 나로서의 시간이 있어야 오히려 육아의 질도 높아지는 것 같아요. ‘20% 짜리 에너지를 가진 엄마로 여덟 시간을 함께할 바엔 95% 짜리 엄마로 두 시간을 함께 하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루에 30분밖에 못 놀아주는 엄마가 아닌, 30분만 집중에서 놀아줘도 충분하다고 생각을 전환했어요. (아이와 집중해서 놀이하는 30분은 생각보다 정말 길기에!)
고운 : 저도 일할 때 ‘자기 효능감’을 더 크게 느껴요. 개인이 직장과 가정에서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이 역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봐요. 저는 일하는 엄마 밑에서 자랐고 시어머니 역시 아직 현역에서 일하고 계세요. 어릴 때부터 일하는 엄마를 보고 자랐기 때문에 다른 옵션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설령 제가 일을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아이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저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인지 개인의 경험 차이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해요. 제가 출산 후 복귀 시점을 고민했을 당시, 아이를 백일 때 어린이집에 맡기더라도 일은 절대 그만두지 말라고 두 분 모두 말씀하셨죠 (저희 아이는 양가 모두 첫 손주랍니다). 이런 환경에 있기 때문에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그저 일과 육아를 ‘완주’한다는 개념으로 임하고 있어요.
Q. (멤버들 모두 딸 엄마인데) 나중에 딸이 결혼을 할 때 혹은 그 이전에라도 임신과 출산, 육아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어떤 것을 꼭 알려주고 싶은가요?
지혜 : 생명을 만들고 키워내는 것이 인생에서 꼭 해봐야 할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딸아이의 임신과 출산을 지지해줄 것 같아요. 단지 이 선택을 하게 된다면 너의 의지와 상관없이 속도가 더뎌질 수 있단 걸, 하지만 그 속도는 개인마다 다르고 속도가 더뎌진다고 해서 너의 본질이나 가치가 훼손되는 건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어요.
혜나 :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이 정말 힘들지만 저를 변화시켜주는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가 그 길을 선택한다면 축복과 용기를 주고 싶어요. 동시에 아이가 마주할 현실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내 것을 내려놔야 하기에 많이 힘들겠지만 점차 괜찮아질 거라고, 결국엔 잘 살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제 아이에게 제가 그런 레퍼런스가 되기 위해 지금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은애 : 아무리 아이가 생기고 엄마가 되더라도 모든 선택에 꼭 ‘스스로를 중심에 두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엄마가 되면 아이의 입장에서 선택해야 할 경우가 많고, 희생인 줄 모르고 희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결국은 원망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가능한 네가 원하는 걸 선택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고운 : 졸업-취업-결혼-출산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아이가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만약 아이가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싶다면, 반드시 그걸 공감하고 지지해 줄 수 있는 남편과 가족들을 만나는 것을 고려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워킹맘 리포트 멤버들 모두 딸아이를 양육 중이라는 것 외에도 포용과 배려심이 많지만 때론 속도가 느린 남편들과 살고 있었다. 배우자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에 공감하며, 주말 이 늦은 시간까지 엄마들의 일과 삶에 대해 논하는 여성들과 살려면 당연한 것일지도)
Q. 흔히들 엄마의 유형을 이야기할 때 워킹맘과 전업주부로 구분하는데, 조금 더 세분화한다면 어떤 구분이 가능할까요? 그 구분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지혜 : 세분화라기보다는 일의 형태에 따라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엄마와 쓸 수 없는 엄마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엄마들이 직장을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가 육아로 인한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게 힘들어서라고 생각해요. 특히 아이들이 아플 때는 답이 없죠. 양육자 스스로가 일의 형태를 유연하게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사회도 변화한다면 워킹맘과 전업주부로만 구분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혜나 : 세상이 구분하는 것처럼 양분하지 말고 대신 일과 육아 사이에서 나는 어디가 좀 더 편한 사람인지, 내 시간과 에너지를 나와 아이에게 얼마큼씩 분배해야 편한 사람인 지, 밸런스로 보자는 의견이에요. 그 지점의 차이이지 엄마의 유형을 한 가지 기준으로만 구분할 수 없지 않을까요. 전업이지만 아이랑 있는 것이 힘든 엄마도 있고, 워킹맘이지만 아이랑 있는 것이 좋은 엄마도 있으니까요.
은애 : 아빠를 워킹대디 또는 전업주부로 구분하지 않고 구분할 필요성도 없잖아요. 엄마도 굳이 구분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육아 휴직 기간에 전업맘으로 지내면서 저는 어린이집에서 엄마를 아이의 5분 대기조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어요. 워킹맘이라고 해서 아이를 신경 쓰지 않는 게 아니듯, 전업맘이라고 해서 엄마의 삶이 전부 아이를 위한 것만은 아닐 수 있잖아요. 그렇게 구분하다 보니 오히려 잘못된 방식으로 엄마들을 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요.
고운 : 굳이 구분하자면 아이가 오늘 어린이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할 때 집에서 쉬게 해 줄 수 있냐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직장맘은 아이가 싫다고 해도 우선 어린이집에 보내야 하니까요. 과거에 비해 고무적인 점은 9-6시 직장 외 여성들에게 다양한 형태의 일이 제시되고 있다는 거예요. 9to6 직장 생활 외에도 재택근무, 스타트업, 파트타임이나 퍼스널 브랜딩을 통한 프리랜서 일을 하시는 분들도 많으니까요. 하루 중 투입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워킹맘과 전업맘에 대한 구분도 점차 모호해지리라 봐요. 그렇기에 저 역시 제 스스로를 워킹맘 대신 직장맘이라 표현하려고 해요. 어떤 형태든 자신만의 일을 하는 여성은 모두 워킹맘이니까요. 결혼과 출산은 여성에게 선택이어야 하고, 엄마가 일을 하던 하지 않던 사회적 강요에 의한 선택이 아닌 철저히 가족 간 합의에 의한 여성 개인의 선택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화에서 소위 일하는 워킹맘과 전업맘 그룹이 나눠지는데 사회에서 일하는 엄마에게는 ‘아이는 엄마가 봐야 하는데’라고 하는 반면 일을 하지 않는 엄마에게는 ‘그 재능 아까워서 어쩌나’라는 양분된 시선으로 바라보잖아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아져야 하고 어떤 선택을 하던 그 선택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말 저녁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열띤 대화가 오간 워킹맘 리포트 첫 세션을 마무리하며 나에게 남은 키워드는 “나의 경험을 넘어선 다양성”이었다. 그리고 그 “다양성”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내가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다음 길을 걸어올 누군가에게 내 경험이 레퍼런스가 될 수 있다는 것. 모두에게 당연한 것이 다를 수 있고, 나에게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 여성들이 엄마들이 먼저 생각을 전환하고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 나와 다른 선택과 경험이라도 인정해주고 지지해주는 것.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지닌 우리들이 모여 개인의 경험을 넘어 나 자신을 확장시키는 이 대화가 바로 커뮤니티의 힘이 아닐까. 지금의 내가 나의 딸과 그 길을 걸어갈 미래 세대에게 레퍼런스이기에, 이전과 다른 개인의 경험이 모여 하나의 문화가 되고 새로움이 당연함이 되는 사회가 도래하길 바라본다. 워킹맘 리포트 첫 모임을 시댁 방문하고 돌아오는 KTX 기차 안에서 참여했지만, 장소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얼마든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해진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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