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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 Mar 17. 2022

1. 다시 여행

밤의 버스

콜롬비아 카르타헤나


죽자고 시작한 일들이 거의 끝이 났다. 몇 년 간 아주 느리게 1인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세상에 꼭 있었으면 하는데 아직 존재하지 않는 책들을 만들면서 살았다. 정말로 그게 유일한 목표였다. 그래서 만들고 싶은 책이 남았을 때는 다음 책을 만들 때까지만 살아있겠다고 다짐했다. 최근 네 번째 책을 내고 나서 만듦새에 대한 거의 패닉에 가까운 후회와 함께 지속가능성에 대한 미련도 내려놓게 됐다.


작년에는 정말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았고, 제법 구체적으로 실현을 상상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2년, 1년 씩 사는 기간을 한정해왔음에도 또 죽음을 미루는 것이 삶을 연장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죽게 되는 순간을 지정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다니?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나에게는 굉장히 생소하고 낯선 감정인데, 그동안 항상 죽을 생각으로만 살았기 때문이다. 죽음에 감성을 더하지 않았고 죽음을 꿈꾸지도 않았고 그저 생명의 연속성을 중단하는 일로만 여겼기 때문에 이 감정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을 떠올리거나 실현 가능한 일을 떠올린다고 한다. 내 경우에는 과거의 감각들이 떠올랐다. 좋아하는 사람과 갔던 식당에서 먹었던 아보카도의 맛 같은 것, 어느 봄 먼 곳에 다녀오다가 들렀던 휴게소의 멈춘 공기 같은 것들. 다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감각들이 전보다 더 생생하게 지금 죽어 있는 내 몸 위에 얹어진 것 같은 상상을 떠올리게 됐을 때 그건 미련이 아니라 이미 예정된 약속 같이 느껴졌다.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을 지도 모르는 그리고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미래의 감각 때문에 죽지 않기를 원한다는 게 가능할까?


그럼에도 내 모습은 여전해서 당장 무엇을 시작하거나 무엇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한동안 잠에 들고 또 잠 든 것처럼 멍하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지금은 숨을 고르는 중이다. 무엇을 해야 하지? 가능하긴 한가? 죽고 싶지도 않고 살고 싶지도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시간 동안 지난 시간을 기억해보자고 생각했다.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 다시 과거의 기억 속에서 감각할 만한 것들을 찾아내는 것. 해야할 것은 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므로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만 하니까.


2016년 1년 정도 남미와 유럽을 여행한 적이 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건강한 머리가 아니므로 내 기억은 이곳저곳의 장면들이 패치워크처럼 아무렇게나 엮여 있고 붙어 있는데 그것들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서가 아니라 다시 한 번 패치워크의 모습들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으로 과거를 기억하기로 했다. 기억속에서 떠오르는 장면들을 마주하고 다시 내보내는 과정은 살아가는 내내 우리가 수시로 반복하는 일이긴 하지만 자신의 행위를 의식하면 놀이가 되는 때가 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생겨난 것도 남미에서 타던 밤 버스의 기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짧게는 6시간에서 길게는 15시간 동안 버스를 타했던 남미에서 이동 중의 기억은 모호하고 기이하다. 낮과 밤의 시간이 잘 구분되지 않고 사고는 잠과 떠오르는 기억, 풍경의 인상을 오가면서 흐릿하게 이어진다. 한두 시간의 이동이 아니므로 무언가를 읽거나 보는 것도 무의미해지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과거를 관조하는 감상자의 태도가 된다. 어떤 것이 사실인지 어떤 것이 창작된 것인지 모르는 기억속에서 헤매고 있으면 내가 생각하는 것들은 기억이 아니라 어떤 인상들이 되어서 장작속의 잉걸불이 빛나는 모습과 아직 타지 않은 나무조각에서 불씨가 살아나 일렁이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그저 놀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은 그런 관망의 놀이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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