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적인 문제에 오래 시달리고 마침내 자신을 병명과 일치시키게 되면 새로운 서사에 대한 염원이 생긴다.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이 우울증을 앓았으며 심지어 자살 시도를 했고 또 많은 이들이 자살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남겼던 기록을 확인하며 우리는 어쩌면 우리에게 증상이 주는 특출난 능력이 있진 않을까 희망하게 된다.
우울증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슈베르트와 같은 조울증을 가진 많은 예술가들이 울증 삽화를 겪을 때 깊이 관찰한 세계에 대한 인상들을 조증 시기에 풀어놓았다고 한다. 스티브잡스나 아인슈타인, 에디슨이 ADHD를 겪었다는 이야기도 많다. 유명인들의 사례가 밝혀주는 것은 정신 질환이 곧 기능의 상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타고나는 지능과 정신질환이 별개라는 뜻이기도 하다.
높은 지능을 타고 났다고 해서 우울증, 조울증, ADHD 등이 발현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질환이 높은 지능과 예술적 감성을 반드시 갉아먹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증상의 한계 안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발현하는 데 성공하는 이들의 사례는 무언가를 이뤄내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와 세상과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심을 놓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낸 이들 즉, 성공한 이들의 사례일뿐이다.
우리에게 우울증이나 조울증이 있다고 해서 그들과 같은 지능과 의지의 원천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며 양육, 교육, 환경적 조건에 따라 증상이 끼친 영향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을 수 있다. 마치 자폐를 가진 아이에게 서번트 증후군을 기대하는 것처럼 정신적 고통을 보상하는 특출한 재능을 기대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해롭게 보이기도 한다. 다른 사회 구성원만큼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장애와 정신적 문제를 철저한 결여와 결핍의 문제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새로운 서사를 창작함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는 연구도 많다. 하지만 그게 특별한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매일 일정한 시간 걷는 일을 통해서, 기록을 함으로써, 누군가와 소통하려는 끈질길 노력을 통해서 우리의 삶은 어제보다 나아진다. 어떤 증상을 어떻게 겪어내고 극복했을지 모를 위대한 인물들에 대한 상상만으로는 창의적인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서사를 원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서사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마스터 플롯을 갖고 살아간다고 한다. 누군가는 복수의 서사, 누군가는 짝사랑의 서사, 누군가는 애절함의 서사와 같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통해서 스스로를 구성하고 내일을 살아갈 동력을 얻는다. 마스터 플롯은 뒤따르는 이야기를 강화하고 계속해서 같은 서사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긴다. 극복해야 하는 것은 부정적 사고 패턴에 따른 작위적 서사이지 질병 자체가 아니다.
우울함에 지치고, 파괴적인 증상에 갇힌 자신을 마주하면 능력 중심으로 세상을 사고하게 될 때가 많다. 어떤 결핍에 의해 세상에 속하지 못하고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강조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거나 무엇을 하지 못하는 능력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는 세상의 잣대를 자신의 끼워넣는 일을 먼저 거부해야 하는지 모른다. 만약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능력이라고 할만한 게 있다면 타인에게 공감하는 능력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3월의 눈>이라는 연극이 있다. 2011년 초연된 이후 관객의 반응이 좋아 매년 봄이 되면 레퍼토리로 공연되었던 작품이다. 연극은 팔순의 주인공 장오가 손주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팔아버린 집을 떠나기 전, 과거를 추억하며 보내는 하룻밤을 매우 절제된 표현으로 그려낸다. <3월의 눈>이 내게 특별했던 이유는 담담하게 이어지는 감동적인 이야기보다는 한 사람의 세계가 펼쳐지는 과정 때문이었다. 연극이 시작되고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 스러져가는 집 안에 서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나이가 많은 낯선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고정된 인상들 안에서 관객들은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과거를 갖고 있는지 관심이 없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 장오는 과거 좌익을 잡아들이던 서북청년단이었다는 사실과 이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민주화 투쟁에 몸 담았던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연극은 배우들의 대사 사이 긴 침묵들이 하나의 언어로 느껴질 정도로 그것들을 드러내고 그려내면서 진행이 된다. 그 침묵 탓에 나는 장오의 과거가 하나둘 현재로 불러내는 이야기의 인상뿐만 아니라 그들의 겪은 이야기를 그들이 발화하기 전까지는 어둠속에 무지한 상태로 놓여지는 나의 상상의 부재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연극이 끝날 때쯤엔 개발에 밀려나 해체되는 한옥 속에 무력하게 놓여진 아무개 노인의 모습이 점점 입체적으로 변하며, 우리는 누군가의 과거를 전혀 알 수 없을지 모르고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멀기도 하므로 한 사람의 세계는 어쩌면 무한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경외도 존경도 공포도 아직 들어가지 못하는 타인의 모습 밖에서 우리는 침묵을 통해서 그들을 존중할 수 있을 뿐이다.
무한한 무지의 영역에서 우리는 겸허하다. 얼마의 시간이든 철저한 고립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는 우리 안의 고통이 얼마나 다양한지 이미 느꼈다. 또한 나처럼 이름 모를 타인들이 겪었을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그들을 손쉽게 이름붙이거나 단정하지 않는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마도 공감이 능력이라는 말에 쉽게 공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공감을 통해서 더 나은 자리에 올라가거나, 인기를 얻거나, 유명인이 될 수 없다해도 공감은 굉장한 능력이다. 공감을 통해서 타인들을 환대하는 것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이들이 자신을 별종으로 인식하고 사회속으로 안전하게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의 존재가 아직 사회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비정상의 구분을 통해서 정상의 지위를 끊임없이 유지하는 사회는 그들이 이미 비정상으로 규정한 것들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비정상의 몇몇 특질을 규정함으로써 정상성의 지위를 확보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정신적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기 보다는 먼저 자신이 정상 사회에서 거부되는 이유에 대해 먼저 분석할 수밖에 없다. 비정상의 이유들을 찾아가다 보면 당연히 정상에 대비되는 자신의 특징들을 찾게 될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병을 갖고 어떻게 살아야되는지는 고민하기 어렵다. 이미 비정상으로 특징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아가려하기보다는 매일 박탈감에 파고드는 일에 처해진다. 우리의 정체성과 지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치유의 방법으로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한동안 골몰해본 적도 있다. 남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해 본 적도 있다.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지만 나에게 부족한 건 의욕이나 집중이었지 시간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을 먹이라고 했지만 그런 것쯤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하고 있었다.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집작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미 나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면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일까? 또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나는 아직도 충분히 나 이하도 나 이상도 아니었다.
오래 고민한 후에 나온 결론은 사랑의 주체가 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주디스 버틀러가 구성되는 젠더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강조한 것처럼 우리는 사회 안에 존재하기 전까지는 아직 우리가 아니다.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내가 누구인지 상호작용을 통해 알아가야 하지만 세상은 정신병을 가진 이들과 상호작용하려 하기 보다는 특정한 이름으로 규정된 집단으로 내버려두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설득해야 할까. 씻기 위해 화장실까지 가기 위해 3일을 보내는 우울증 환자가, 한 가지 과업을 끝내기 위해 1년이 걸리는 ADHD 환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밀어내는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 개개인이 직장에서 그들에게 우리의 증상을 이해해달라고 설명해야 할까. 아무리 이야기한다 해도 그들은 아마 불쌍하지만 같이 일하거나 함께할 순 없는 사람으로 이미 정해진 규정 안에서 사고할 뿐일 것이다.
우리를 다시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우리 서로의 모름에 대해 겸허한 사람들일 것이다. 자본은 우리를 효용없는 존재로 가치없는 존재로 치부할 테지만 사회는 분명 경제적 가치를 가진 물질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상처받고, 위축되고, 겸허한 존재들은 세상이 끔찍한 곳으로 변해갈 때 타인을 존중하고 환대하는 가슴을 가진 채로, 모든 이들의 삶이 불가능해지진 않도록 사회의 테두리 밖으로 벗어난 이들이 살만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고 맞잡고 함께를 제안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우리 같은 존재가 없었다면 이미 무너졌을 것이다.
이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을 사회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을 달래는 것만으로 우울감을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하는 만큼 오르지 않는 연봉, 노력해도 자신의 눈에 차는 연애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절망감, 기능할 수 있지만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의 허무는 스스로에게 좋은 것을 대접하고 자신에게 긍정적 사인을 주는 것으로 해결될지 모른다. 내일이면 사회의 구성원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에게는 스스로 인정하기 전까지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불구의 이미지가 있다. 그러니까 실패할 때마다 한쪽편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불구의 괴물이 우리가 만든 형상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부족하고 모자란 모습에 대한 정의는 사회가 만들어 온 구성물일 뿐이다. 나사가 빠진 것 같은 모습, 어딘가 어리숙한 모습, 불쑥 치솟는 감정에 압도되는 그 모습 그대로 우리는 완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