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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꽃피 Feb 29. 2024

파몽 2.5

작업노트 블루






'사월에 꽃마리 피다'의 책을 독립출판하는 과정에서 책표지의 색감과 같은 계열의 책들을 컬렉팅해 읽고 있다. 이성적이고 체계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인 방법이고, 풍부한 정서적 교류를 단숨에 담을 수 있기도 한 신비로운 방법인 것 같다. 소설 『사월의 꿈』의 1편 '한숨‘의 표지가 블루이기에 한동안 블루에 물들어 있었고, 앞으로도 자주 그럴 것이다. 새로운 블루를 찾고 있던 중 항상 내 옆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남색 작업노트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도 쓰고 있는, 표지와 내지가 모두 믿음직스럽게 두터운 이 노트의 첫 기록은 2017년이다. 와. 나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에 몰두해 있었구나. 무섭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내가 작업을 하고 일을 해 왔던 방식은 사회가 요구하는 정석적인 방식도, SNS로 진행 상황을 충분히 노출할 수도 있는 이 반(反)신비주의 시대에 대중이나 독자가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는 친절한 방식도 아니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마저도 알아줄 수 없는 방식으로,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의 단독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나의 일을 했다. 하지만 항상 열정적으로 삶을 탐구하고 수많은 예술을 탐미했으며, 그러한 열정의 부작용으로 무너지기도 우울하기도 했으며, 어떤 면에서는, 단면적으로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음에는 틀림없다.


이 '단독적이고 은밀한' 작업은 적어도 얼마 전까지의 나에게는 가장 실제적인 방식이었다. 글이란 결국 한 명의 개인에 의해서 쓰이는 것이고, 『사월의 꿈』이 한 명의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꿈을 주제로 하기에, 마음껏 내면을 분석하고 연구할 수 있는 대상이 필요했다. 더 나아가 단지 분석과 연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생생한 체험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니까 나 자신이 그 정신 탐구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더 넓게는 삶이 있고 글이 있는 것이기에, 가장 자유롭고 믿음이 가는 방식으로 삶의 주도적인 운행자로서 스스로를 성찰했다. 도대체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떻게 시간을 쓰고 관계를 맺고자 하는가. 그 이전에, 도대체 넌 어떤 인간이니. 너의 실체를 드러내 봐.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나의 감정들을 오롯이 느꼈고, 넘치고 넘치는 생각 더미를 뒤졌고, 될 수 있는 한 모든 기억들을 되돌려 보았고, 앞으로의 삶에 있어 가장 커다란 그림을 그려보았다. 이 시간들은 검은 글자를 담기 이전의 백지였으며, 이 사회가 추구하는 명백한 그리드가 아닌 여백을 이루는 사각형이었다. 나는 백지와 사각형 속을 자유롭게 유영했다. 나의 생명을 깨끗한 도마 위에 놓고 문학과 예술의 모델이 되는 생 자체에 주목했다.





온전한 방식은 아닐 수 있다. 이 길 위에는 궁극적인 목표와 부합하지 않는 걸림돌도 많았다. 너무 지나치게 나 자신에게, 개인의 관심사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과거에는 생각보다 그런 기회조차 지나치게 없었다는 점을, 또 원하는 주제를 깊게 파고들 만한 최소한의 능력조차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달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음 단계의 성장을 위해서라도 이러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정신 구조를 더듬어 가며 정리하고 구축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어 내야 함을 잘 알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사람들과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더욱 예민하게 살피고 느껴야 했다. 불건전한 나르시시즘에 세밀하고 정확하게 반대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을 알아야 했다. 책을 읽고 쓰기를 멈추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행위보다도 그러한 행위의 원액을 들이키고 맛을 파악하는 것이 언제나 우선이었다. 책을 읽고 쓰고 대상을 보고 듣는 나의 의식은 대체 어떤 모습인지가 절실히 알고 싶었다. 그것을 알아야 더 탁월하게 읽고 쓸 수 있을 테니까.


내면 세계를 탐독하는 것은 불안한 모험이면서 감탄의 연속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구체적이라니! 한 명의 개인이라 생각했던 것이 이렇게 많은 연결 속에 존재하는 것이라니! 내면의 구석구석을 구체적으로 다면적으로 느끼고 이해하면서 나를, 사람을, 세상을 더욱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전에 내가 했던 것이 진정 사랑이었나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진정 존재로서의 만남이었나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과 삶과 이야기의 주변을 뱅뱅 맴돌며 머리로만 분석하고 이미지로만 파악하려 했던 피상적이면서 상상적인 사랑은 그 중심으로 몸소 뛰어드는 실체적인 사랑이 되어 갔다.


적당한 순간에, 자연스럽게도, 나의 무모하고 울퉁불퉁한, 때로는 지독하게 외롭기도 했던 시도들의 가치는 내면의 극명한 변화와 회복, 그로부터 시작된 삶과 타인에 대한 자세의 변화, 무엇보다 이에 힙입어 전환을 맞이하게 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증명되었다. 나는 존재의 근본적인 성장, 존재의 뿌리에 영양을 제공할 수 있는 질 높은 성장을 간절히 원했고, 다행스럽게도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는 성취를 이루었다 자부할 수 있다.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것. 나 살아 있어요! 팔딱팔딱 살아 있다고요. 그렇게 마음껏 떠들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그렇지만, 뭐랄까. 신이 난다.





『사월의 꿈』의 2편 '인류 죽음의 원리'도 세상 밖으로 나왔고, 아직 수정을 거쳐야 할 3편 '한결의 시계'의 원고가 내 앞에 있다. 나도, 사월도 변화된 모습으로 새로운 세계의 문 앞에 서 있다. 꿈을 모델로 한 이 세계는 성격도 움직임도 통통 튀는 인물들, 시간과 기억의 역동, 생의 에너지로 가득하다. 3편의 제목이 다른 인물의 이름을 통해 암시하듯 새로운 세계는 사월의 정신이 한결의 시선, 즉 타자의 관점으로 전환되거나 확장될 것임을 예견한다. 작업의 방식도 아주 자연스럽게, 다른 국면에 와 있음을 느낀다. 찰랑일 정도로 내면 속에 차오른 에너지가 밖으로 밖으로 흘러넘치고 있다. 안에서 고이 태웠던 정열의 불길이 저만의 주체성을 주장하듯 외부로 치솟는다. 나는 더 이상 삶의 주변을 맴돌지 않고 그 중심 안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그 중심의 중심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 활짝 열린 지혜의 말들과 정갈하게 쌓아올린 작가의 텍스트, 앞다투어 매혹을 뽐내는 예술가의 이미지들, 맹렬하게 끄적인 내밀한 메모들이 나를 견고하게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모조리 찢어발기고 다시 이어 붙인다. 내가 좋아하는 콜라주처럼! 죽었지만 살아 있는 영혼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한편, 나는 살아 있지만 죽어 가는 영혼들에게 말을 건넨다. 이리 팔짝 뛰고, 걸림돌은 저리 걷어차고, 문제를 기꺼이 직면한다. 팔딱팔딱 살아 있다고요.


이제 나는 나를 또렷하게 살아 있는 존재로서 느끼고, 또 다른 존재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갈구한다. 더 깊은 내면의 세계로 그들을 안내하고 초대하고 싶고, 그들이 유지하고 발전시켜 온 세계가 무척 궁금하다. 나는 사월의 정신보다 좀 더 앞선 지점, 지금, 여기에서 사월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한결의 이름을 부른다. 이왕이면, 그의 이름이 '하나의 결핍'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듯, 그 결핍이 안으로 굽이치는 사월의 시선을 밖으로 대담하게 이끌고 확장시키듯, 눈에 훤히 보이는 결여를 가진 자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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