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4화. 여행은 예측불허
배정받은 렌터카는 푸조였다. 외산 자동차를 운전해 볼 수 있는 즐거움도 내가 이 여행을 기대한 이유 중 하나였다. 백미러와 사이드미러의 각도를 조절하고, 시트의 높이를 맞추고 첫 시동을 걸었다.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잘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공항 주차장을 빠져 나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2층 주차장에서 빠져나와 공항건물을 에워싼 도로를 달리다 다시 주차장으로 진입하기를 세 번. 겨우겨우 공항을 벗어나는 도로에 오를 수 있었다.
파리 시내로 들어가는 고속도로에 진입했지만 세차게 내리는 비로 시야가 너무 나빴다. 서울에서 내 차로 운전하듯 편안하게 하자고 아무리 마음을 다스려도 등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잔뜩 맺혔다. 지독하게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차 안에도 침묵과 긴장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도 긴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내가 먼저 입을 떼야할 것 같았다.
“비가 만만치 않게 내리네요.”
“그러게요. 아무래도 저는 비 내리는 파리와 악연이 있나 봐요. 그때도 오늘처럼 비가 많이 내렸거든요. 저는 햇빛이 가루처럼 쏟아지는 센강을 늘 상상해요. 근데 8년이 지난 오늘도 그 상상이 또 여지없이 깨지는군요.”
“저도요. 파리는 모든 순간이 다 그림처럼 아름다울 줄 알았는데... 오늘은 좀 아니네요. 공항도 파리에 포함되는 거죠?”
그녀는 잠시 웃었다.
“8년 전 그때 파리 북역에 도착한 첫 느낌은 너무 엉망이었어요. 거리의 쓰레기, 부랑자들, 바퀴가 고장난 캐리어, 예약이 제대로 되지 않은 한인민박, 좁고 지저분한 공동객실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게다가 파리 전체를 물에 불려 놓을 것처럼 쏟아지는 비까지! 진짜 누구라도 걸리면 시비 걸어 싸움이라도 한판 하고 싶게 만들었어요. 폭발이 진리인 순간이었죠.”
“그리고 아까 이야기해 준 그 절친과 다툼까지 생겼고요?”
“흐흐 네, 맞아요.”
홀로 고독하게, 멋있게 유럽을 여행하겠노라 왔는데 잠시나마 예상치 못한 동행이 생겼다. 여행이란 얼마나 예측불허인가. 낮선 땅, 낯선 자동차, 어색한 한국어 발음의 네비게이션, 정신없는 도로와 교통체계, 수면부족, 도로 표지판, 쏟아지는 비, 늦은 밤...게다가 낯선 그녀까지. 이런 뜻밖의 상황들은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긴장시키는지. 여행의 묘미는 바로 이런 긴장감인가.
나는 여전히 어색한 푸조를 타고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파리의 밤거리를, 어떤 여자와 함께 달리고 있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은 현실. 여기가 파리는 맞나? 나는 아직 한국 어디 쯤에 있는 게 아닐까? 고속도로 너머 멀리 보이는 파리 시내는 마치 자유로에서 보는 일산 같기도 했다.
파리라는 타인들의 도시가 문득 익숙한 내 공간처럼 훅 밀려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