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연재-3화. 비 내리는 샤를 드골 공항
“이제 거의 도착했네요. 파리는 비가 오나 봐요. 겨울에 비오는 날이 많다던데. 지난번에 오셨을 때는 어땠어요?
내 물음에 그녀는 한참이나 창밖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 듯 말했다.
“그때도 파리에는 비가 왔어요.”
8년전 유럽에 온 그녀는 절친한 친구와 함께 했던 긴 여행을 했고 마지막 장소가 파리였다. 아, 파리! 사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화와 사진을 통해 파리를 만나왔는가. 얼마나 아름답고 낭만적인 파리를 꿈꿔왔는가. 파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도착하기 전부터 마음을 설레게 했다고 했다. 화려하고 따뜻하며, 여유롭고, 세련된 환상의 파리를 말이다.
하지만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현실에서 만난 파리의 모습은 조금 실망스러웠고, 너무 긴 여행을 마치고 온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진 탓도 있었을 것이라 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햇빛은 찾아볼 수도 없었고, 하늘에서는 오늘처럼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이상과 현실의 어긋남은 들뜬 여행자의 마음을 한 순간에 무너뜨렸나보다. 오랜 시간동안 부딪힐 만큼 부딪혀왔다고 생각했던 친구였지만 몸도 마음도 지쳐버린 그녀와 친구는 아주 사소한 말다툼 하나로 갈라서고 말았다. 에펠탑 앞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서 걸었던 기억. 낯선 여행지에서 몸도 마음도 지쳤을 때, 끝까지 서로를 보듬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녀의 눈동자 안 어딘가에서 약간의 후회와 쓸쓸함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날 비 내리는 파리에서 그녀는 혼자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걸었는데 비오는 파리도 친구와의 헤어짐도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뜻밖의 상황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걷는 것뿐이었다. 타국의 차갑고 낯선 공기 속에서 혼자 비 맞으며 터벅터벅 얼마를 걸었을까. 결국 그녀는 그날 저녁을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도망치듯 파리를 빠져나왔다고 했다.
비는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심한 연착으로 시간은 이미 예상보다 훨씬 늦어 있었다. 을씨년스런 유럽의 겨울이 더욱 우울해 보였다. 비행기에서 내릴 때가 다가오자 그녀와의 대화는 다시 서먹해졌다. 내리고 나면 전혀 몰랐던 사람처럼 다시 돌아서야 하니까, 눈인사만으로도 충분한 사이가 되어버릴 테니까 그런 것일까? 꼬치꼬치 이후의 행선지에 대해 캐물을 수도, 그렇다고 질문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조심스런 마음 때문에 그녀와의 대화는 종종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그 어색한 침묵과 침묵 사이를 부산스런 짐정리로 메워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기체가 착륙을 마치자마자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출국장으로 빠져나왔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함께 쓴 공항 안내판을 보자 드디어 파리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이 잠시 스쳤다. 어서 수하물을 찾고 예약한 렌터카를 인수해, 복잡하고 분주한 풍경에서 빠져 나가고 싶었다. 그래야 고대하던 프랑스에 발을 디딘 게 제대로 실감날 테니까. 내 짐은 금방 나오지 않았다. 같은 가방이 몇 번이나 내 앞을 지나고 나서야 새로운 캐리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기둥을 따라 돌아가는 컨베이어 너머로 그녀의 모습도 보였다. 무표정한 그녀가 계속 신경 쓰였지만 다시 다가가 말을 걸기도 마뜩찮았다. 나는 그저 내 짐을 찾는 척하며 가끔 곁눈질을 할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내 가방이 나왔다. 나는 얼른 카메라 가방에서 렌터카 바우처와 면허증을 찾고 짐을 정리했다. 그 사이 그녀는 사라져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렌터카를 인수하는 과정은 걱정과는 달리 간단했다. 담당직원은 예약 바우처와 국제면허증을 제출하니 확인 후 바로 자동차 열쇠를 포함한 각종 서류가 담긴 봉투를 건넸다. 좋은 여행이 되라는 인사를 얹어서. 비 내리는 밤, 공항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종종걸음이었다. 공항을 빠져나가 제각각 집으로, 숙소로 돌아가야 할테니까. 더 비가 쏟아지기 전에, 더 밤이 깊어지기 전에. 나도 부랴부랴 렌터카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던 중에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터미널로 가는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파리에 있는 숙소로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약간 놀라며 날 바라보고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네. 어떻게 가야 할까 생각 중이에요. 너무 연착을 해서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네요. 비도 내리고요. 게다가 문제가 좀 생겼어요. 제 짐이 경유지에 있어서 내일 저녁에나 여기로 온대요. 시작부터 여행이 꼬이네요. 중요한 물건들이 다 그 짐 속에 있는데...... 너무 난감해서 멍해요, 지금. 아참! 자동차 렌트는 잘 하셨어요?”
“아, 그래서 계속 여기 계셨군요...그런 일이 가끔 있더라고요. 흠... 이 시간에 택시 말고는 시내로 들어갈 방법이 없어 보이는데, 제 차로 가는 건 어때요? 네비게이션도 있어서 주소만 알면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정말요? 그럼 저야 너무 좋죠. 택시비를 드릴게요.”
“에이, 택시비라뇨? 무슨! 비행기에서 인사도 했고, 밤도 너무 늦었고, 캐리어 문제도 있고... 또 우린 고흐를 사랑하는 한국인이고 큭큭! 그리고...음...또 비도 오니까요.”
“네, 비가 내리죠...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는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거든 하세요. 저도 파리 운전은 처음이라서요. 어떻게 될지 몰라요. 하하하. 렌터카는 2층 주차장에 있대요. 어서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