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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랑 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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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Apr 04. 2023

사랑 출국 2

소설연재-2화 떨림

경유지인 중국에서 비행기를 옮겨 탔다. 오른쪽 옆자리에 대학생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의 한국인이 앉아 있었다. 프랑스 여행책자가 앞좌석 등받이에 꽂힌 걸 보니 그녀의 여행지도 우선은 프랑스인 것 같았다.


 낯선 이와 오랜 시간 동안 좁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 팔걸이를 공유하며 갈 때, 적절한 타이밍에 말을 걸지 못하면 참으로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하지만 나 역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넙죽 말을 거는 편이 못 된다. 특히 그녀처럼 매력적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기 위해서는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출발한 지 여섯 시간이나 흐르고 나서야 겨우 어색한 한 마디를 건넸다. 이미 어색해질 대로 어색해져 있었지만...


 “프랑스를 여행하실 계획인가 봐요? 저도 여행가는 중이거든요.”

 “아.... 네, 첫 유럽여행이라 두근거리는데 비행기가 흔들려서 더 떨리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로 살짝 떨리는 듯 했다.

 “그렇죠? 저도 비행기에서 그 부분이 제일 힘들어요.”
 “파리에 도착하면 어디로 가세요?”


 그녀가 물었다.


 “일단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을 여행할 생각으로 왔어요. 자동차 렌트해서. 고흐를 좋아하거든요. 고흐가 사랑했던 아를에도 가고 싶고, 오베르에도 가보고 싶어요. 그리고 그 다음은 상황에 따라가 보려고요.”   

 “어머? 저도 모리스 피알라 감독의 <반 고흐> 영화 보고 오베르에 가보고 싶었는데...... 그 영화는 고흐가 요양하러 오베르에 오면서 시작하잖아요.”

 “우와, 자크 뒤트롱이 주연했던 그 영화를 아세요? 고흐가 죽기 전 67일간의 기록을 담은 영화... 그거 꽤 옛날 영화인데?”

 “저도 고흐를 엄청 좋아해서요. 예술극장에서 찾아봤어요. 빈센트 반 고흐의 책이랑 영화는 대부분 사 모으고 봤던 편이에요. 히힛!”


 어색했던 옆자리 여자가 갑자기 십년지기 친구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같은 여행자라는 것과 고흐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저랑 비슷하시네요. 그림을 그리다보면 늘 고흐가 떠올라요. 살아서는 지독히도 가난했고, 인정받지 못했던 화가였던 고흐는 얼마나 외롭고 불행했을까......”

 “어머, 그림 그리시는 분이세요?”

 “그냥, 조금씩 그려요.”

 “살아서는 단 한 점밖에 팔리지 않았으니...... 팔리지도 않는 그림을 죽기 살기로 그려냈던 고흐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내 그림이 팔리지 않는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언젠가는 내 그림의 가치를 깨닫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내 그림이 돈으로 따질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이 말이 동생 테오에게 썼던 편지에 나오죠?”

 “맞아요. 영혼의 편지요. 오베르에 있는 고흐 무덤에 가서 술 한 잔 따라주고 싶어요. 당신의 그림은 정말 괜찮았다고요.”

 “후후후! 비행기 안에서 또 고흐 제사 지내시는 분 만났네요.”

 우리는 고흐의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보통의 대화란 ‘제가 고흐를 좋아해요.’ 그러면, ‘아, 정말요?’ 혹은 ‘아, 그러시구나.’ 정도에서 끝났다. 아니면 ‘아, 저도 좋아해요.’ 정도의 맞장구가 최선이었다. 더 이상 대화가 진전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녀와는 달랐다. 고흐의 이야기가 영화 이야기로, 영화 이야기가 책 이야기로 넘어가고, 다시 그림과 꿈, 예술 이야기로 나아갔다. 처음 만난 사람과 이렇게 빠른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는 건가? 처음 겪는 일이라 난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기분 좋은 당혹감이었다.


 “도착하면 저녁이라 공항 근처 호텔에서 하루 묵고 출발하거나 피곤하지 않으면 그냥 가는 데까지 남쪽으로 내려갈 생각도 하고 있어요.”

 “정말요? 렌터카로 그 멀리까지 혼자서요?”

 “네. 첫 유럽여행인데 짐 끌고 기차 타고 지하철 타고 다닐 생각하니 막막하더라고요. 제가 가고 싶은 곳을 편하게 다니기엔 대중교통이 쉽지 않고요. 자유롭기도 하고. 유레일패스, 대중교통 비용 합친 거랑 별 차이도 없고 해서 일단 렌터카에 도전해 봤어요... 다녀온 사람들 책 읽어보니까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대단하시네요. 혼자서 자동차 여행! 멋있어요.”

 “그런데 파리에 가까워질 수록 걱정이 되긴해요. 큭큭큭... 아, 그러고 보니 파리에 도착하면 밤 11시가 넘을 텐데, 숙소는 예약하고 오신거에요?”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예약해 뒀는데, 약간 걱정이에요. 너무 늦어지면 택시를 타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우선 내려서 대중교통을 확인해 봐야죠.”


 어색한 침묵을 깨고 나눈 대화. 이름도, 나이도 모르지만 상관없는 사이. 비행기 안에서 그저 잠깐 옆자리에 앉은 인연. 여행은 이렇게 수없이 많은, 그러나 짧은 인연들로 채워지는게 아닐까? 아주 가끔은 그 짧은 인연이 매우 특별한 시작이 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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