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주 Sep 26. 2023

미국 세 달 살기 일지 (1) 사유

퇴사 후 여행 와서 얻은 첫 번째



퇴사 후 이곳에 와 반강제적인 휴식을 가지며 가졌던 것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첫째로 깊은 사유를 통해 자신에 대해 고민했다. 처음엔 올바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조차 난관이었다. 가지고 싶은 직업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모델, 개발자, 컨설팅, 작가, 운동 강사, 사업가 등 여러 직업을 펼쳐놨다. 직접적인 경험 없이 상상을 하려니 어려웠다. 각 직업마다 다양한 분기점과 가능성이 있을 테 였다.


무언가 질문이 잘못된 것 같았다. 다음으론 하고 싶은 취미를 모았다. 돈과 관련된 행위가 아닌 내 작은 흥미들에 집중했다. 리스트를 만들었다.


성격 분석 테스트를 통해 나를 분석하고 여러 질문을 던졌다. 효과가 있었던 건 '특별히 닮고 싶어 하는 롤모델이 있나요?'였다. 부러워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에 대한 수많은 시간과 물음을 거쳐 나에게 맞는 질문을 찾았다. 내 키워드는 '존경하는 것'이었다. 나는 깊이가 있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다음은 내 욕구를 마주하는 것이었다. 나는 깊이가 갖고 싶다. 나는 지혜로운 자들을 시기한다. 원초적인 욕구를 찾고 나선 계획을 밑에서부터 다시 쌓았다. 깊이는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 어떤 분야에서 깊이를 가지고 싶은지.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깊이를 가진 사람들은 주체적인 사고를 한다. 정보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 수집하고 정리한다. 이들은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만들기 위한 각자의 프로세스를 갖추고 있었다. 정보를 수집해도 자신에게 녹여 가지고 있지 못하면 깊이는 생기지 않는다. '기억력도 스펙이다(KBS과학카페기억력제작팀 저)'를 읽으며 기억 훈련의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이들은 양질의 콘텐츠를 접한다. 좋은 인풋은 좋은 아웃풋을 낳는다. 오락성으로 소비하거나 논리적이지 못한 콘텐츠가 아닌 검증된 콘텐츠를 접한다. 대부분 책을 통해 학습을 한다. 유튜브를 내려놓고 독서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저)'의 서론에서 글쓰기를 집 짓기에 비유한다. 읽으면서 내 쓰기 습관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둘째로 사랑하는 일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요즘사 커뮤니티에서 혜민 스토리 파인더 님이 하신 이야기가 있다. '100% 확신보다 51% 정도의, 반보다는 1% 정도 헤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하기 싫은 일이 9이고 좋은 순간이 1 이어도 그럼에도 하고 싶다면 그게 좋아하는 일라고 생각한다.'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게 좋아하는 일이 있는지. 당시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오늘 '구글의 종말(조지 길더 저)'를 읽으며 연상이 되기 전까지.


'현재 인터넷 보안이 붕괴됐음은 분명했다.'라는 내용이 1 챕터에 소개된다. 보안의 문제점에 꼬집어준 저자에 감사했고 저 밑에 가라앉았던 사명감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미국에 있으며 한국 보안 업계에 대한 회의감을 느꼈다. 업계에 대한 생각을 하면 화가 나고, 감사하고, 안타깝다. 진심을 다해 아끼고 있다.


사명감은 자신이 이 일을 꼭 해내야겠다는. 책임감과 유사한 감정이다. 직업에 대한 사명감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업계에 종사하면서 그렇게 생각하며 달려왔다. 사명감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길을 잃지 않는다. 나는 독특하게 깊이에 대한 시기, 질투로 무너진 것이다. 동시에 내가 다른 직업에 사명감을 가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내게 왔다.


생각은 '보안 인식이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으로 마음이 다시 돌아온다. 어떻게 깊이를 쌓을 수 있을지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 깊이를 만들기 위해 기록 체계를 수립한다.


셋째로,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사랑에 있어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신의 형상을 띈 사랑은 본질적으로 나를 우선순위에 두지 못한다. 사랑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넷째로, 나를 꾸며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 사회에 적응하며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꾸며낸 이미지를 내세울 때가 많았다. 여기선 내 모습과 감정을 인지하고 솔직하게 내보이는 걸 연습했다.  


다섯째, 모든 일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인생은 파도와 같다. 시련과 기회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리진 않는다.


세 달간 적어둔 일지들 중 가장 인상 깊은 일지다.

'세상 속에 자신을 지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파도는 나를 향해 친다. 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그와 나는 다르고 다른 길을 가고 다른 신념을 가지는 것처럼. 모든 상황에서 각자는 다른 결정을 한다. 파도에 휩쓸려 삶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 파도가 쳐도 걷는 각자의 길이 있는 거다. 그니까 겁내고 두려워하지 말자. 스스로를 믿자.'


불행과 행운이 나의 삶을 결정하는 건 아니다. 하루를 대하고 일생을 받아들이면서 내 삶은 온전해진다. 미국에서 사유하는 시간은 고통스러웠지만, 내게서 유의미한 결론들을 도출했다.




작가의 이전글 시카고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