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을 기억하며
*그들의 이름은 가명처리 됩니다.
그녀의 오빠 이름을 뭐라고 할까. 서준, 서준이라고 지칭하도록 하자. 미영의 오빠 서준은 말이 없던 사람이었다.
엄마인 미진의 말을 빌려보자면 “어렸을 땐 친구도 많고 사교적인 편”이었다고 한다. 나도 초등학교 때 오빠가 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그때는 사교성이 많았던 게 확실하다.
아마 그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중학교 시절을 지나 보내며 사춘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서준은 중학교 시절 남자들이면 으레 겪는 사춘기를 크게 겪었지만 점점 소심해지는 성격에 밖으로 방황하기보다 집에서 마음의 문을 닫았다.
그에게 또 하나의 불행 요소였던 건 동생의 미영에게 부모의 모든 관심이 갔다는 것이다. 서준이 소심한 사춘기를 남몰래 겪는 반면 동생인 미영의 사춘기는 그야말로 집에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동생은 그와는 달리 아픔을 밖으로 드러내는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레 서준의 사춘기는 주목받지 못했다.
엄마는 서준이 시키는 건 뭐든 잘한다고 생각했다. 서준은 좋다, 싫다의 표현을 하는 편이 아니었고 웬만한 문제는 트러블 없이 지나갔다. 이때만 해도 서준은 주변에 손을 내밀었다.
어느 날엔 엄마에게 탁구를 치러 가자고 했다가 바쁜 엄마에게 거절을 당했다. 다른 날에는 부모님의 외도을 눈치채기도, 동생인 미영이 우는 소리를 방문 너머 자주 듣고는 했다.
그는 그럴수록 자신은 조용히 커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 불행을 느꼈을까?
서준의 유서에 쓰인 ‘중학교 시절 이후 행복한 기억이 없다.’는 구절을 봐서 그는 이때부터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던 것 같다.
고등학교는 동네에서 가장 성적 입결이 높은 곳으로 갔다. 중학교 때 공부를 꽤 잘했던 서준이었기에 그 사실은 그에게 어느 정도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나이 때 모든 아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하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은 그에게 안 좋은 선택이었다.
근방에 날고 기는 학생이 모두 왔던 그 고등학교에서 서준은 특별하지 않았다. 더 이상 뛰어나다는. 그나마 그에게 정체성을 부여해 준 우수한 학생은 없었다. 그 사실이 그에겐 또 하나의 상실이었을 거다.
그래도 이때 가장 좋아했던 취미는 애니메이션 보기, 친구들과 모여 시시콜콜 게임하기 등 보통의 학창 시절과 닮아있다. 이때까지 서준은 열심히 살았다. 학교를 믿고, 무심한 부모님의 믿음을 믿고 나아가면 답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다. 자신의 적성도, 자아에 대한 고민도 제대로 깊게 겪을 생각 없이 그는 성적에 맞춰 중국어과를 갔다. 서울에서 나름 알아주는 대학교에 입학해 주변에선 좋은 소리를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준이 중국어과를 간 건 서준을 아는 모든 사람의 무심함이 모인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중국어를 한 번도 배워본 적 없었고, 회화 수업이 많은 학과에 적응할 수 없었다. 서준이 자퇴를 결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출석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 사실조차 늦게 알게 되었다.
서준의 가정은 꾸준히 그에게 무심했다. 미진은 나름의 방식대로 애정을 쏟았지만 그조차 방관이 주를 이뤘고 일방적인 잔소리는 그에게 폭력처럼 느껴지곤 했다. 서준의 세상은 어디에서 멈춰있을까. 그의 유서에 내용을 보면 중학교 때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는 걸 볼 수 있다. 우리가 그 시절 그를 돌보지 않고 그 자리에 방치했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의 세상은 그 어디쯤에 존재할테다.
서준은 그렇게 집에 들어가 잘 나오지 않았다. 집에서 게임을 주로 하며 시간을 때웠고 미진에겐 말했다. “재밌어서 게임을 하는 게 아니고, 시간을 때우는 거다.”
시간이 흘러 군대라도 가라는 주변의 말과 어쩔 수 없는 국방 의무에 그는 두려움이 일었다. 이때 그의 첫 번째 유서가 발견되었다. ‘내가 죽으면 유골은 바다에 뿌려줬으면 좋겠다.’
잠시 미진의 이야기를 해보자면 그녀는 성실하게 살아가는 엄마였다. 이래저래 아이들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열심히 살았다. 그녀는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 집안에 가장 같은 역할을 도맡았다. 드세고 강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표현하는 게 서툴렀다. 딸인 미영은 그녀와 대차게 싸우는 반면 아들인 서준은 속을 알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그녀는 “너네 오빠는 뭐든 말을 안 했어.”라고 한다.
미영의 사춘기가 지나가고 성인이 된 서준이 게임만 하게 되면서 미진은 서준에게 마음을 쏟았다. 그건 일방적인 잔소리와 의지 같기도 했다. 밖으로 서준을 끄집어내려 노력했고 여러 잔소리를 했다.
서준의 첫 번째 유서가 발견되고 미진은 많이 울었다. 불안했고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집착을 품었다. 그녀는 그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오래 고민했고 아들이 군대를 제대한 뒤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서준의 취업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서준의 군대 시절은 의외로 무탈했다. 주어진 일을 매일 수행하는 것이 그의 학창 시절과 닮아서일까. 그는 군대 동기들과도 잘 지냈고, 나름의 밝은 모습도 보였다. 미영도 이때 서준의 편지를 처음 받았다.
제대 후 친구와 제주도를 가고 예쁜 별을 보았다. 꽤나 인상 깊었는지. 아니 사실, 그에 인생에 그런 좋은 추억이 많이 없어서 제주도에서 본 아름다운 별과 재밌게 탄 놀이 기구 이야기는 나도 기억이 난다.
서준은 엄마 친구의 회사에 취업을 했다. 그 시절엔 서준이 가장 빛나던 시절이다.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 그는 즐거웠다. 서준은 주어진 일을 했고, 자격증을 땄다. 그의 상사와 술을 먹고 골프를 쳤다.
상사는 엄마와 친한 사이여서 나도 이런저런 말을 전해 들을 기회가 많았다. “클럽은 안 가봤다. 가게 된다면 미영과 가지 않을까요?” 같은 내겐 마음이 너무 아픈 말이다.
어느 날 이모에겐 이런 말도 했다. “엄마, 아빠는 미영밖에 모른다. 사업자 이름도 미영세상이지 않냐. “
나는 어느 순간부터 엄마를 울리고 속상하게 하는 그가 밉곤 했는데 생각해 보면 너무 어렸고 생각이 짧았다. 서준은 미영을 미워할 법한데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겐 가장 친한 친구가 미영이었다.
미영과 둘이 여행을 간 적도 있다. 사후에 컴퓨터를 확인했을 때 ‘미영과 연천’, ‘친구와 제주도’ 이렇게 두 개의 폴더가 있었다.
서준의 반짝이는 일 년이 지나고 그는 다시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엄마 친구의 사업이 어려워져 그는 회사에 머물 수 없었다. 상사는 그래도 서준을 남기기 원했지만 미진은 그의 배려를 거절했다. 그 결정은 미진이 평생 후회 할 몇 개의 순간 중에 하나이다.
서준이 집에 머물던 때 미영은 취업을 했다. 서준은 그녀에게 가방을 사줬다. 서준이 회사에 다닐 때 미영도 그에게 가방을 사준 적이 있었다. 미영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은 그때의 기억이 좋았다.
이후의 이야기는 기억하기가 어렵다. 미영은 취업 준비 때부터 자취를 시작했고 입사하고는 집에 잘 내려가지 못했다. 서준은 미영이 입사한 지 육 개월 이후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서준은 아빠와 사업을 준비했고 내가 보기에도 잘 풀려가는 것 같았다. 미진은 서준이 뭐라도 하길 원했고 그의 아빠는 전부터 하고 싶던 사업을 서준과 함께 하려 했다.
서준은 사업을 시작하기 2주 전 계약서를 모두 쓴 후 그렇게 갔다. 그 사업은 셋에게 모두 동상이몽이었다. 부모님에겐, 특히 미진에게 이 일은 큰 상처로 남았다. 서준에 심경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들은 그가 등쌀에 떠밀려 세상에 나오는 게 힘겨웠을 거라 추측한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은 사업을 위해 집을 이사한 날 밤이다. 서준은 저녁에 짜장면을 먹으면서 술을 먹자고 의견을 냈다. 우리 가족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고 피곤함에 다들 일찍 잠에 들었다. 그의 작은 의견은 조용히 묵살당했다.
서준의 유서엔 이런저런 넋두리와 중학교 때 생을 마감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 시 한 편이 써져 있었다.
서준이 끝내 누구의 탓도 하지 않은 게 가장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