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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Optimist Apr 28. 2020

코로나로 쉬는 회사와 근로자의 고통분담

노동법상 휴업과 사회적 고통분담

어떤 사람이 돈을 주고 고래 모형을 사기로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사실 그 고래모형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인데, 물건을 주고받기로 하기 전날 부서져 고칠 수 없게 되었을 때. 거래 당사자는 돈을 지불해야 할까요? 물건을 주기로 한 사람이 잘못해서 그렇다면야 책임을 지우면 될 것 같은데, 천재지변처럼 특별히 잘못한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는 게 옳을까요?


모형을 주고 받기로 약속한 것을 법적으로는 "계약"이라고 하고, 이 사례는 계약의 "이행불능"을 설명할 때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사례입니다. 하나뿐인 물건이 아니라면 이행불능이 아닙니다. 같은 종류의 다른 물건을 사서 갚으면 되니까요. 


민법에서는, 물건을 주기로 한 사람에게 "귀책사유"가 있다면 채무불이행의 책임을 지우고(해제권행사/손해배상청구), 없으면 위험부담의 문제가 되며, 우리 민법의 채무자주의원칙(민법 §537)에 따라 채무자(물건을 주기로 한 사람)는 상대방(물건을 받고 돈 내기로 한 사람)의 이행(돈 내기)을 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물건을 주고 돈을 받기로 한 사람은 물건을 잃지만 돈을 못 받고, 돈을 주고 물건을 받기로 한 사람은 물건은 받지 못하지만 돈은 지킬 수 있는 결과가 되지요.




전문 영역도 아닌 민법 얘기를 이렇게 오래 한 것은 최근 노동관계에서 이 문제가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근로계약도 계약입니다. 근로자는 근로를 제공할 의무, 사용자는 임금을 지급할 의무를 맞교환하는 계약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민사법 원칙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위의 이행불능사례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로계약은 특정 시점에 노무를 제공해야 한다는 성질때문에, 근로계약에 명시된 시기에 노무제공을 하지 못하면 바로 이행불능의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가령, 근로자가 결근을 하면 근로자 귀책의 이행불능으로 사용자는 임금지급의무를 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당해고와 같은 사용자 귀책사유의 경우에는 해고기간의 임금상당액을 손해배상금으로 지급하여야 합니다.


(민법 전문가는 아니지만,) 민법에서의 "책임"이란 고의나 과실 있는 경우에 한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전염병이 돌아서 일이 없는 경우는 고의, 과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요? 사용자의 고의, 과실이 입증되면 사용자가 100% 책임을 부담하고 입증이 되지 않으면 양자 책임 없는 사유이니 사용자는 0%의 책임을 지지만 근로자는 임금을 아예 지급받지 못하게 되는 셈이 되어버리는 것이죠. 너무 극단적입니다.


임금이 갑자기 끊겼을 때의 생활불안, 고의과실 입증의 어려움과 같은 문제들 때문에 근로기준법에서는 휴업수당이라는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사용자의 귀책사유로 휴업하는 경우, 평균임금의 70%를 지급하라는 제도이죠. 



여기서의 귀책사유는 불가항력이 아닌 한 사용자의 지배범위 안에서 발생한 경영장애라 하여, 민법상의 고의과실보다 조금 넓은 범위인 것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명확한 기준이 있지는 않고, 원도급사의 조업중단, 원자재 부족 등이 귀책사유에 해당한다는 사례들이 있을 뿐입니다.


명시적인 입법취지가 밝혀진 바는 알지 못하나, 사용자의 고의과실이 있는 경우와 책임 없는 사유 사이의 애매한 gray area 안에 있는 상황에도 사용자의 지배범위 안에서 발생한 경영장애라면 근로자의 생활불안을 방지하기 위한 책임을 70%까지는 분담하라는 취지가 아닌가 합니다. 여기까지는 경영위험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부담하는 것이라는 게 입법자들의 입법의도가 아니었을까요.




노동부에서는 지침을 내어 추가감염 방지를 위해 '불가항력적'(확진환자, 밀접접촉자 등 발생)으로 인해 쉬는 경우와 현실적 감염가능성이 낮으나(밀접접촉자 등 미발생) 매출감소로 휴업하는 경우를 구별하여 사용자 귀책사유로 인한 휴업인지 여부를 판단하겠다(후자는 사용자 귀책에 의한 휴업으로 휴업수당 지급대상이나, 전자는 아니다)는 입장을 일찌감치 내놓은 바 있습니다. 


이 기준은 지난 메르스, 신종플루 사태 때에도 노동부가 사업장을 지도하던 기준입니다. 휴업수당 이하를 지급하는 유급휴직, 무급휴직, 연차휴가 소진은 본인의 신청/동의가 있지 않는 한 위법합니다. 


일이 없는 회사는 전염병 때문에 매출도 안 나오는데 쉬는 직원들 월급도 주어야 하냐는 걱정에, 일이 있는 회사들은 전염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산업현장의 한숨이 깊습니다.


다행히도 정부에서 상당히 기민하게 대책을 내놓아, 업종과 규모에 따라서 90%까지 고용유지지원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론상 사용자가 휴업수당을 70% 지급하면, 그 금액의 90%까지는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에 평소 임금이 100이라고 했을 때 근로자는 30, 사용자가 7(물론 여기에 퇴직적립금, 4대보험료 등 제반비용은 추가적으로 들어갑니다.), 정부가 63을 분담하여 책임을 지는 구조인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서론에서 이야기했던 위험부담의 문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의 잘못인 지가 명백하다면 책임을 지울 사람도 명확하겠지만, 지금처럼 누구의 잘못인 지가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상대적 강자인 사용자에게 70% 라는 큰 비율의 부담을 지웠지만, 상황에 맞추어 정부가 이 부담을 줄여주었고, 사회 전체가 세금을 통해 이 부담을 분담하게 될 테니 결국은 우리 모두가 고통을 분담하는 결과로 귀결되지 않나 싶습니다.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의 연대의식이 살아있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만 몇 가지 아쉬운 것은 있습니다. 정부에서 대책은 기민하게 내놓았으나, 구체적인 기준이나 신청방법이 지역까지 내려오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이 있습니다. 생색은 중앙에서 내는데, 고통은 일선 실무자들이 받는 구조였죠. 신청기준이나 절차가 어느정도 정리가 되고 나서 발표가 이루어져야 실무에서 혼선이 없는데, 언론에서 먼저 터지고 지침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데다 기준은 날짜별로 바뀌다 보니, 현장에서 잘못된 정보가 퍼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사회적 고통분담을 통해 지원받는 것을 마치 당연한 권리인 양 생각하는 풍조가 보였던 것 또한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는 비단 노측, 사측의 문제가 아니고 재난기본소득 등과 관련해 나타났던 사회 전체적인 모습이기도 했지만요. 다만, 이러한 경험들을 추후 사회적 연대의식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는 계기로 만들 수 있다면 오히려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에는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세가 어느정도 안정기에 들어 선 것으로 보입니다. 끝까지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유지해 이 사태를 잘 매조짓고,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의 피해 없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기원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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