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새 학기, 새 친구, 새 직장, 새 집, 새로운 나라, 이 모든 것들에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는지 긴장하고 경계하던 모습들은 곧 사라져 버린다. 감사하거나 고통스럽게 느끼던 그 모든 환경들에 무덤덤해지고 심지어 권태를 느끼기도 한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어찌나 적응을 금방 했는지. 몇 주 만에 현지인 빙의가 되어 골목마다 가득 찬 투어리스트들과 단체 관광객들의 물결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도 관광객인 주제에.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도 하다.
고작 5주를 머물렀던 나도 끊이지 않은 관광객들로 인한 피로를 느끼는데, 오랫동안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떤 심정일까.
바르셀로나의 찬란한 태양과 반짝이는 바다, 맑은 공기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지상 낙원 같은 이 곳에도 물가상승과 구직난, 정부에 대한 불만과 환경오염 등 현실적인 문제들이 존재한다. 현지인들에게는 바르셀로나도 생존을 위해 경쟁하고 투쟁해야 하는 냉혹한 땅이다.
카탈루냐 지역이 독립하려는 움직임으로 인해 정치적 불안정이 더해지고 있다. 이러한 분리 독립운동의 경제적 결과를 우려하는 기업들은 이 지역을 떠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고, 그 여파로 부동산 가격 역시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세율은 여전히 높지만 금융위기 이후 복지의 질은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고 중앙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드세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정쟁, 주거문제와 복지문제, 노동문제 까지.. 역시 사람 사는 곳의 고충과 애환은 다 비슷한 걸까.
그나마 바르셀로나는 세계적인 관광지인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염려가 없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관광객들이 바르셀로나에 와서 쓰는 돈이 도대체 얼마인데. 도대체 어떤 현지인이 관광객들을 적대시하고 관광업의 발달에 반대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서민들이 실감하는 현실은 생각보다 팍팍한 듯했다. 보케리아 마켓을 구경시켜주던 현지인은 보케리아 마켓 안에서 일하고, 그 안에서 식사도 해결하던 상인들이 이제는 마켓의 물가가 너무 높아져 샌드위치 하나도 사 먹지 못하는 실정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물가가 높아지면 그 물건들을 파는 상인들의 소득도 높아지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관광객이 몰리게 되면서 정기적으로 대량 구매를 하던 현지인 구매자를 잃은 탓에 상인들의 주머니 사정은 예전보다 나아지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었다. 관광객이 늘면 모두가 그 혜택을 골고루 나누어 볼 것 같은데, 현실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그런 안타까움을 표현했던 사람 역시 바르셀로나의 투어리즘을 통해 먹고살고 있는 외국인이었어요. 아르헨티나의 불황을 피해 바르셀로나로 이주한 그는 보케리아 마켓 바로 옆에 아파트를 빌려서 에어비앤비 호스트도 하고, 요리 수업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집을 소유한 사람들은 현지 거주민에게 임대를 주던 아파트를 관광객을 상대로 훨씬 더 높은 값에 내놓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인기로 인해 사람들이 몰리면서 생활 물가는 점점 오르는데, 도심에서 일을 해온 노동자 입장에서 노동임금이 크게 증가하지 않는 이상 높아진 생활비를 감당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바르셀로나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온 노동자들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란다. 바르셀로나에 관광업이 발전했다고 해서 그 경제적 혜택이 그 삶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서민들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한 달 살기를 막 시작할 무렵, 산타마리아 델 마르 성당 벽면에 크게 그려진 "Tourist go Home" 문구를 보고 의아해했었는데, 다음 날 다시 찾은 현장에서는 그 문구가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그리고 한 달 살기 막바지에 벙커 가는 길 곳곳에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바르셀로나 서민들이 직접 지었다는 그들의 성당, 그리고 바르셀로나 주민들의 히든 스폿 벙커. 현지인들의 애정을 받는 그 두 곳에서 관광객들을 향한 그들의 성난 목소리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어딜 가나 힘든 사람은 더 힘들어지고 돈 있는 사람은 더 부유해지는 부조리한 현실. 관광업이 발전하고, 내가 사는 도시가 전 세계적인 관광도시가 되면 모두에게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데, 그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는 바르셀로나 역시 지상낙원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