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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죠기 Jun 05. 2020

내일 출근을 해, 말아

술을 못해서 송구합니다만


이런 게 전형적인 한국 기업의 회식문화일까. 가끔 회식이라고 하면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였던 고상한 회사에서 초식동물로 지내온 탓에 족발집에서 소주잔을 앞에 두고 사장님 말씀을 늘어놓는 L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이 회사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음식 주문은 또 어떻고. 다들 부족한 눈치인데 누구 하나 나서서 시원하게 음식이 부족하다고 더 시켜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다들 술로 배를 채우려는 건지 테이블 위에 소주병은 빽빽이 쌓여간다. 모두가 전속력으로 달리는 분위기다. 소주는 물론 맥주도 최대 한 캔 정도밖에 못하는 내 주량이 송구스러워지려 한다. 이 알콜식 동물의 왕국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베타 서비스 론칭은 모둠전 집에서   


"2차는 전집으로 갑시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그 전집이 역사적인 장소가 될 줄은.


웰컴 회식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로 회식 자리에서는 일 얘기가 오고 간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우리는 미국을 대표하는 엑셀레이터 프로그램에서 면접의 기회를 얻게 된 것에 흥분하고 있었다. 베타 서비스 론칭은 몇 주 뒤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실리콘벨리의 투자자들에게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서는 실제 고객들의 사용 경험과 피드백이 필요했다. 우리는 베타 서비스를 론칭을 몇 주 뒤에서 며칠 뒤로 앞당겼던 차였다.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L은 왜 베타 서비스 론칭을 위해 며칠을 더 기다려야 하는지 훅 들어와 묻는다. 지금 당장 회사에 돌아가서 서비스를 론칭하잔다.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농담이 아닌가 보다. 모바일로 웹사이트에 접속한 L은 버그를 발견해버렸고 즉시 고쳐야 한다고 개발자 T에게 요청한다. 정색에 가까운 표정을 보니 농담이 아닌 게 확실하다. 개발자 T는 주섬주섬 노트북을 꺼내 그 자리에서 일을 시작한다. 난 속으로 혀를 두르며 그 장면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참.... 개발자네 참개발자야.



나 내일 출근해야 하는 걸까


"카톡"

"카톡 카톡"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밤낮이 없는 우리의 업무 카톡방은 또다시 바쁘게 새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다. 나는 조금 전 개발자들이 버그 잡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틈을 타, 내일을 기약하며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한 터였다.


카톡방에는 연달아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억될 사진들이 업로드된다. 모둠 전과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동그란 스텐 테이블 구석에서 마침내 베타 서비스를 디플로이 하는 개발자의 모습이다. 카톡방에는 나도 질세라 기쁨의 이모티콘을 하나 날리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가고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다.

 

입사 첫 주부터 이어진 야근에 끝까지 달리는 회식 문화. 그래. 베타 서비스 론칭을 앞둔 스타트업이니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나 같이 밥 먹는 게 중요한 사람한테 눈치 보면서 메뉴를 골라야 하고, 야근을 해도 밥을 주지 않는 회사라니. 일을 할 때도 대표의 눈치를 그렇게 봐야 한다니.


나랑은 정말 맞지 않는 것 같다. 적어도 입사 첫 주의 심정은 그랬다.

아, 이 회사. 괜찮은 걸까.

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내일 출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집으로 가는 길 택시 안, 내 마음속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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