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는 굉장히 무딘 성격이었다. 언제나 안정적이고 내가 문제 삼는 일들에 대해 전혀 크게 생각하지 않는 걸 보고 이 아이는 왜 이리 성격이 좋을까?라고 생각하며 늘 부러워했다.
흔히들 말하는 눈치가 많다는 얘기는 친구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고 과거에 우리가 함께 지냈던 일들은 늘 나만 기억을 했다.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상황에서 함께 겪었던 일들을 다 기억하는 나와 함께 갔던 장소도 기억하기 힘든 친구를 보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며 섭섭해하곤 했다.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문제의 심각성도 많이 달랐다. 나는 몇 날 며칠을 끙끙 앓고 살아가는데 반해 친구는 그날만 속상할 뿐이지 더 이상의 감정이입을 하지 않았다. 10년이 지나도 자세하게 기억하는 나에 반해 그 문제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친구를 보고 답답하기만 했다.
그땐 친구의 그런 털털한 면이 너무 부러웠다. 기억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나만큼 힘들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런 면이 내 눈엔 엄청난 장점으로 보였다. 또한 나의 지나친 예민함은 단점으로 보였다.
성인이 되고 머리가 커지고 나서 나는 엄청 섬세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섬세하기 때문에 예민함이 따라오고 쉽게 지나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지 남들이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걸 금방 알아챈다. 눈치도 빠른 편인데 눈치를 워낙 많이 보는 위치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걸 떠나서 분위기와 기류의 흐름을 잘 느끼는 것 같다. 사실 모든 것엔 장단점이 있는데 내가 가진 예민함은 나에게 있어 단점이라고 생각됐던 적이 많다. 그만큼 예민해서 힘든 부분을 스스로 극복하는데 힘에 부친다. 예민함을 장점으로 극복해 보라는 전문가의 말에 노력도 해보았지만 내 노력과 상관없이 흘러가는 현실에 제자리에 머물기에 일쑤다. 사람마다 극복하는 노하우가 있겠지만 난 최소한의 자극으로 살아가는 걸 선택했다.
가정주부라는 크나큰 찬스는 이럴 때 활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가정주부로 살다 보면 가정 안에서 쏟는 에너지가 대부분이다 보니 최소한의 자극으로 살아가는데 괜찮은 편이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날이 설 수 있는 나의 예민함을 최소화로 할 수 있었고 전문가의 말대로 장점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대로 찾게 되었다. 가정주부로 사는 내내 나의 섬세함과 예민함을 가정 안에서 장점으로 활용하였다. 보이는 게 많다 보니 아이들을 양육하는 데 있어서도 두세 배로 움직이게 되었고 집안에서의 시간 활용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할 수 있었다. 외부의 자극을 줄여보니 스트레스를 덜 받기 때문에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고 쏟아야 할 에너지를 필요한 곳에 쏟게 되었다.
섬세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할 때도 단점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행동들을 꼭꼭 챙겨하고 잘 넘어가지 못하는 특성 때문에 나도 모르게 집착하고 있을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멈추자고 되뇌고 손을 떼어본다. 스스로 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발전이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그동안. 섬세함과 예민함을 긍정적으로 풀기보다 부정적으로 풀었던 그 시간들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장점으로 활용한다면 남들보다 2~3배는 효과를 볼만도 한데 단점으로 많이 치중되어 있던 시간들이었다. 지금도 장점보단 단점을 더 많이 느끼고 있지만 다행인 건 장점도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섬세함을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느꼈던 칼날처럼 뾰족했던 저 끄트머리 감정들을 "왜"라는 궁금증으로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참 괴로운 일이란 걸 잘 안다.
다행인 건 이런 나의 섬세함과 예민함을 닮은 아이들을 보면 이해해 줄 수 있고 공감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섬세한 사람들에게 이해와 공감은 불안을 줄일 수 있고 피어나는 생각들을 잠재울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내게 어려웠던 숙제를 DNA가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는 건 엄마로서 참 괴로운 일이다.
그래서.. 조물주는 내게 섬세함과 예민함을 돌 불 수 있는 노하우를 주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