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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듯한 제이 Sep 20. 2020

04.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이 이야기는 카메라를 두 번 교환한 이후, 세 번째 교환이 있기 전의 이야기이다.


카메라를 받고 오매불망 머리맡에 놔두고 잠들기를 몇 주 지났을까. 드디어 일상 사진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카메라를 사용해볼 기회가 찾아왔다.

지인의 결혼식이 서울에서 진행되었고, 서울에 올라가는 김에 서울에 상경해 밥벌이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둘도 보기로 했다. 얼마나 설레던지. 거기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을 가게 되었으니, 로망이었던 비행기 창문 샷을 미놀타로 남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게 뭐라고 이다지 설레발 칠 일인가 싶지만 그땐 정말 정말 너무너무 미놀타로 촬영할 새로운 피사체들이 고픈 시기였기에 진심 머리 끝까지 설레서 잠 못 이룰 정도였다.


양 손 무겁게 어디를 가는 것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정말 큰 결정이었다. 커다란 가방과 더불어, 당시 케이스가 없어서 스트랩만 연결에서 들고 다니던 미놀타는 가방 안에 넣으면 흠집 날까 애지중지 몇 번이고 고쳐 매야 하는 어깨에 걸치고서 먼 서울 여행을 가다니 말이다. 다행히 미놀타가 그다지 무거운 무게는 아닐지라도-아무리 깃털만큼 가벼운 물건도 계속 들고 다니면 벽돌처럼 무거워지듯-미놀타를 어깨에 메고 다닐 나의 최후가 머릿속으로 그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의 나에게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이유였기 때문에 귀차니즘을 미놀타가 이긴 것이었다.


당시 비행기 안에서 촬영한 사진


참 운이 좋게도 같이 올라간 동호회 사람들이-내가 활동하는 사물놀이 동호회가 전국구 동호회라, 부산 사람들이 서울 동호회 사람의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대거 상경했었다.-카메라로 찍기 좋은 곳들을 많이 갔다. 그중 한 군데가 이태원이었다. 아침에 텅 빈 이태원 거리에서 순대국밥집과, 함께 간 오빠의 옷을 사러 간 남성 전문 큰 옷 가게를 들르는 와중에도 해맑게 이리저리 바쁘게 시선과 발걸음을 옮기며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에 함께 갔던 언니 오빠들은 경상도 사람들답게 몇 걸음 앞서가면서도 조금씩 보폭을 줄여 기다려주었다.


 

서울 지하철에서 건너편에 앉은 지인들의 발을 촬영했다



그리고 결혼식이 마무리될 때쯤 갔던, 친구의 직장이 있는 빌딩 숲의 올림픽 공원 근처에서도 꽤 좋은 결과물이 상상되는 장면들을 미놀타에 담으며, 정장을 빼입은 친구의 모습도 찍어주고 나름 얼마나 열심히 한 롤을 채웠던지. 그때 나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그만큼 내 시선 끝에 들인 품도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결혼식 장면까지 2 롤 정도-라고 해도 합치면 60장이 넘는 컷이다.-를 부지런히 채워 벅찬 마음으로 미놀타의 첫 롤을 스캔했는데 왠 걸. 정말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카메라가 3주를 채우지 못한 시점에 약간의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아무리 카메라가 꽤 오래된 중고제품이라고 해도...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신이시여. 게다가 이미 두 번의 교환을 한 나로서는 정말 업체에 대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날 노을이  참 예뻤는데 말이지.



고장난 카메라의 시선 사이에 낮 달이 걸려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그나마 4분의 1 정도의 풍경은 남겨놓고(?) 고장이 나서 어느 정도 내가 어떤 장면들을 담았는지 틈새를 볼 수 있다는 정도. 업체에 혹시 본인의 사용상 부주의 인지 여쭤봤을 정도로 그때의 난 아무것도 모를 때였는데, 다행히 친절한 사장님께서는 이런 적이 정말 없는데 유독 고객님한테만 자꾸 이런 일이 생긴다며 정말 죄송하다고 했다. 원인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반사판이 오래되어서 탄력 있게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문제인 것 같다며 곤란해하셨던 것 같다.

어쩌겠는가... 그나마 서울여행에서 남겼던 반틈 정도의 사진을 전부 저런 식으로 날렸지만, 그나마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결혼식까지는 멀쩡했던 시간들은 그대로 남겨 여태까지 감상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교환을 한 이후로는 다행히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의 4번째 미놀타는 멀쩡히 살아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미놀타를 솜털 다루듯 했었던 나였지만, 지금의 나를 생각한다면-절대 애정이 식었다거나 그런 류의 마음은 아니다-지금의 미놀타가 무사히 제 역할을 해주는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며 좀 더 아껴주어야겠다고 생각을 다잡는다.


짧은 거리를 가거나 긴 여행을 갈 때 나의 곁에 언제나 함께 하게 된 여행 친구 미놀타와 또 다른 많은 곳들을 경험하고 싶다. 되도록이면 건강하게 온전한 신체(?)로 장수하자 내 사랑 미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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