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시하나 빌리지에서의 추억
작년 1월에 떠났던 치앙마이에서의 한 달 살기, 그 마지막은 오롯이 혼자 보내기로 했다. 치앙마이 도시에서 꽤 떨어진 곳에 덩그러니 지어져 있는 숙소에서 한 달 간의 길었던 여정을 추스르고 며칠 묵기로 한 것이다. 그곳의 이름은 '호시하나(星花)'. 일본어로 지어진 이름인데, 한국어로 번역하면 '별꽃'이라는 뜻이다. 별과 꽃이 가득한 곳이라 그렇게 지어진 걸까? 내가 갔을 때는 꽃은 몰라도 푸르고 넓은 정원을 실컷 거닐고, 쏟아질 듯 빼곡한 별은 밤마다 실컷 감상했었다.
호시하나에 도착하면 직원이 친절하게 숙소의 이용수칙에 대해 말해주고 수칙이 적힌 종이를 주는데, 짐 정리를 하고 찬찬히 종이를 읽어보던 중 신기한 문구를 발견했다.
'가끔 고양이가 코티지로 놀러 올 수 있습니다.'
놀러 오다니, 정말로? 검색을 하다 보면 그런 후기를 가끔 보기는 했지만, 내가 묵는 숙소는 고양이가 즐겨 찾아온다는 그 숙소가 아니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즐겨 찾아온다는 집은 문 자체가 없는 진흙으로 지은 흙집 콘셉트였다. 그래서그런지 그 숙소에서 묵은 사람들의 후기 중에 고양이가 먼저 들어와 자고 있었다는 글을 심심찮게 봤지만, 그런 일 또한 코티지의 특성 때문이려니 하며 수영장에서 만나는 여러 마리의 고양이들에 만족하기로 했다.
고양이와 함께 잠들 수 있다니 말도 안 된다며 나에게 그런 행운은 없을 것이라고 애써 단정 지었지만, 다음 날 낮이 되자 밖에서 어떤 고양이가 계속 우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그러려니 하며 보고 있던 영화에 집중하며 앉아있었는데, 고양이는 멈추지 않고 마치 나를 부르는 것 처럼 울어댔다. 그것도 내 숙소 문 앞에서 제법 가까이 들리는 소리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숙소 문을 열었더니, 천연덕스럽게 미끄러지듯 내 다리에 슬쩍 기대며 들어와서는 이리저리 둘러봤다. 당시 여행의 끄트머리라 나름 여독을 풀 겸 태국 마사지를 예약해놓은 상태여서, 아쉽지만 고양이를 방 안에 두고 문을 잠글 수 없었으므로,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오렴 야옹아."하고 말하고 문을 열어 내보냈다-지금 생각해보니 가라는 말도 귀신같이 알아차린 듯 하다-. 그리고 1시간가량 볼 일을 보고 들어왔는데, 웬걸? 기다렸다는듯 풀 숲에서 좀 전의 그 고양이가 튀어나와 야옹 하며 다가왔다.
'사람인가...?'
태국 고양이가 어떻게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신기하면서도, 내가 자신에게 호의적인걸 이미 눈치챈 야시 방맹이(?) 고양이는 하루 묵을 집에 숙박하는 호구 집사를 찾다가 나를 발견한 것이리라 추측했다. 고양이는 문을 열자마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가더니 난 제대로 누워보지도 않은 침대에 올라가 낮잠을 자다 나갔다.
그 날 저녁 다른 고양이와 영역싸움인지 하필 또 내가 묵는 숙소의 창밖에서 굉장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충망 위로 한 고양이가 뛰어올라 나를 놀라게 했다. 아래에서 어떤 녀석이 계속 위협하고 있어 내려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애타는 목소리로 울길래 나가보니, 낮에 내 숙소를 자기 집인양 들어와 낮잠까지 자고 갔던 그 고양이였다. 낮에 만났을 때도 목에 보호대를 차고 있었는데, 그 보호대 때문에 아래로 뛰어내리지 못하는지 애처롭게 매달려 울고만 있었다. 보호대는 다리에 난 상처를 핥지 못하게 하기 위해 씌워둔 것 같았다. 성묘가 아닌 듯한 작은 몸집에 귀여운 얼굴을 한 그 고양이는 어쩌다가 다리를 다쳤나 궁금했는데, 이런 이유였나 싶으면서 납득이 갔다.
위협하던 고양이는 내가 다가가자 다행히 조용히 풀숲으로 사라졌다. 내 키가 닿지도 않는 높이까지 올라가 바들바들 떨고 있던 녀석을 떼어내는데 꽤 애를 먹었다. 겨우 아이를 안고는 온몸에 묻어있는 먼지와 나뭇잎과 지푸라기들을 떼어내는데 한동안 집중했다. 자기를 도와주는 걸 아는지, 가만히 내 손길을 받아내며 마다하지 않던 그 고양이를 밖에 둘 수가 없어서 방 안으로 데려왔다. 작은 몸을 둥글게 말아서 한참을 그렇게 자던 고양이는 짐 정리를 하는 나를 몇 번이고 계속 불러댔다. 왜 부르나 싶어 가보면 안아달라고 조르고, 안아주면 계속해서 그르릉거리던 그 고양이. 어찌나 사람을 좋아하는지 계속 만져달라고 정수리를 들이밀며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예전부터 고양이에 대한 로망이 아주 많았지만 아버지가 애견가셔서 꿈만 꾸고 있던, 게다가 고양이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황홀하면서 애틋해지는 그 감정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벅찼다. 결국 고양이의 꽴에 빠져서 짐 정리를 미뤄놓고 한 동안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치앙마이의 밤은 우리나라의 초가을 날씨와 비슷해서 쌀쌀한 편인데도, 고양이의 체온 덕분에 따뜻했다. 작은 몸집에 한없이 연약해 보이는 그 아이는 어찌나 따스하던지. 다음 날 떠난다는 걸 아는지 전 날 보다 한참을 더 숙소에 머무르다가 떠났는데, 다음 날 아침 홀연히 다시 찾아왔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떠나는 날 작별인사라도 하러 온 것처럼.
날 향하던 그 고양이의 온기롭던 뒷모습과, 등 뒤로 날 보던 올곧은 시선이 가끔 생각날 때면 어김없이 그때 그 고양이의 사진을 꺼내어 본다. 그 날의 조명과 장면 속 고양이를 보고 있자면 기억이 되살아나 내 품 안이 따뜻해지는 듯한 착각 속에 또 한 번 그때의 온기를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온전히 나에게 의지해오던 작고 따듯했던 체온을 그렇게 기억한다. 언제든지 내가 말을 걸면 대답해주던 다부졌던 목소리와 예뻤던 얼룩무늬의 몸집을. 소리 없이 분명했던 고양이의 가벼운 발걸음과, 한치의 망설이 없이 날 마주쳐오던 티 없이 맑았던 눈동자도. 고양이와 나에게 무중력 같았던 작고 네모난 정갈했던 흰색의 방도, 침대의 민무늬 희고 부드러웠던 이불의 촉감도, 그날 밤하늘을 빼곡히 채웠던 무수한 별들의 개수도 모두 기억이 난다. 그 고양이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으로 이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부디 잘 지내기를. 아프지 말고, 싸우지 말고 건강하렴 야옹아.
아마도 그 작은 방을 가득 채웠던 것은 고양이 너의 위로, 너의 웃음, 너의 체온과 애정이었을 거야. 해가 바뀌던 창가로 비추던 그날의 볕과 그 밤의 별들이 이따금 생각나는 밤이면 어김없이 난 그때 그 치앙마이의 마지막 여정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져. 널 위해 기꺼이 내어놓았던 나의 잠자리, 작은 이부자리를 덮어주었던 볼품없지만 온기롭던 나의 작은 맘까지 그대로 간직해주길. 아니, 모든 것은 내가 기억할 테니 걱정 말고 잘 살기를 바랄 거야. 앞으로도 너의 존재를 알아줄 수많은 이들의 잠자리를 빌리며 하루하루 차가운 밤공기를 피해 잠들겠지. 그럼 모든 이들은 기꺼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널 위한 작은 공간을 내어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단다.
언젠가 내가 치앙마이에 다시 가게 된다면 그건 그 고양이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여행은 나를 내려놓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와 마주하는 과정이기에 또 그 나름의 힘듦이 있기 마련이다. 평생 살면서 한 달 동안 계속되는 여행을 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당시 꽤 많이 지쳐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눈 안에 계속해서 원인모를 티끌이 나던 상황이었기에 빠이의 한 병원에서 처방받았던 안약만 넣어가며, 몇 번이고 재발하는 그 통증과 이물감을 견뎌야 했다. 하필 그 부위가 눈이어서 괜히 겁도 났고, 눈이 아프자 더 피곤하고 예민해져서 한국에 돌아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 상황에 여행을 혼자 마무리를 해야 했던 여정의 막바지가 힘겨웠다. 아마 눈이 아프지 않았다면 고양이와도 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한편으로는 덕분에 숙소 밖을 구경하는 시간이 줄어들어서 고양이와 둘이서 숙소 안에서 보낼 시간이 늘어났나 싶기도 하다. 그 시간을 위로해주기 위해 그 고양이가 나에게 잠시 다녀갔는지 모를 일이다. 여독이 쌓여 나를 괴롭히던 시기에 편안한 숙소에서 푹 쉴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좋은 추억을 만들어준 호시하나의 그 고양이에게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아는 지인이 그 후에 그 숙소에 묵게 되었는데 그 고양이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귀엽고 당돌했던 그 고양이.
다음에 만나게 되면 이름을 물어봐야겠다. 그럼 그 녀석은 어김없이 내 말에 답해주겠지,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