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에서 삼년
그게 나의 인생을 흔드는 희로애락 아닐까?
깜깜한 밤, 너의 풍경
안녕, 난 료료야. 이번 주는 희로애락에서 마지막 네 번째 락의 시간이야. 얼마 전에 첫째 딸이 이렇게 말했어. "엄마, 난 깜깜한 밤에 풍경을 보게 되면 눈물이 나." 그래서 내가 왜 눈물이 나?라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어. "어두워지면 여기가 한국인지 프랑스인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갑자기 기분이 좋았다가 슬퍼져."라고 말이야. 짧은 대화가 끝나고는 일부러 큰 소리로 우는 흉내를 내며 냅다 끌어안아 버렸어. 장난인 거 같겠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어. 서로의 눈망울에 눈물이 고여있었다는 걸. 매일 말하고 있지 않지만 언제든 니스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길가에 오렌지 나무와 야자수, 그리고 올리브 나무 또.... 지중해의 끝없는 바다 말이야. 차만 타면 어디든 달려갈 수 있을 거 같았어. 대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게 그렇게나 좋은 점인지 모르며 살았던 시간에 허무함까지 들었던 적도 있어.
말하자면 우리 가족은 프랑스 니스에서 삼 년을 지내고 왔어. 며칠 전 귀국한 지 일 년이 되는 날이었지. 알다시피 난 이번 해로 마흔이 되었어. 마흔 인생을 살면서 기껏해야 삼 년을 살다 왔는데 그곳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상대적으로 큰 꿈을 꾸고 온 거 같아.
니스에서 삼년
왜 이렇게 그곳이 그리울까? 말도 통하지 않는 곳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려는 걸까? 사 년 전 한참 코로나 시즌이라 유럽이 봉쇄되고, 동양사람들이 인종차별 당하는 영상이 SNS나 유튜브, 틱톡에 많이 올라온다며 주위에 걱정을 많이 끼쳤어. 나도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던 거 같아. 아이들에게 이것만은 꼭 지키자고 당부했었지. 이웃에게 인사를 잘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친구들과 잘 지내라는 정말 뻔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 일이 최선일 수밖에 없었어. 그녀들은 프랑스어는 물론 영어도 사실 못해서 언어 소통이 쉽지 않았어. 누가 그러더라고. 애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어른이 걱정이지. 그랬던 말이 처음에는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 말이 맞았어. 삼 년 뒤 니스에서 한국으로 떠나올 때는 아이들의 눈물바다였어.
처음 갔을 때 둘째가 6살이었는데 거의 한 달 동안 밤마다 토하기를 반복했어.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물갈이하나 보다 했었어. 집을 구하지 못하고 에어비앤비에서 한 달 반을 지내기도 했었지. 집을 구하지 못하면 은행 계좌를 못 만들고. 은행 계좌를 만들려면 집을 구해야 했어. 정말 황당하지? 그리고 집을 구하지 못하면 학교도 배정받을 수가 없었어. 어쩌다가 한 달 반 만에 겨우 집을 구할 수 있었지. 결국 집을 한국 계좌에서 돈을 보내 계약하고, 집 계약서를 가지고 은행 계좌를 만들게 되었지. 다음은 학교 차례인데 집 근처로 배정을 받고 싶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어.
니스에 도와주는 한인 오페라 성악가분이 계셨는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큰 도움을 주셨어. 그분도 학교 배정받는 일은 오래전에 알아본 일이라 어디서 받으시는지 동네마다 또 달라서 방법이 어려웠던 거야. 어쩌다보니 세 번이나 따로 만나게 되었어. 처음 간 곳도 아니고 두 번째도 세 번째에 겨우 교육청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어. 학교 배정해 주는 업무 해주는 곳을 한 번에 알 수 없다는 거에 또 놀라기도 했었지. 정말 미안하고 고마워서 인사를 여러 번 했던 거 같아. 미안한 일은 만들지 않는다는 주의인데 타국에 나와서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부분이었어.
여전히 프랑스 집주인에게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 오백만 원, 이탈리아 도로 한가운데에서 자동차 바퀴를 일부러 펑크를 내곤, 우리 가방을 통째로 소매치기를 해간 녀석 때문에 비행기를 놓친 적도 있어. 체류증도 신청하는 건 쉽지 않았어. 어엿한 남편의 파견근무로 프랑스에 간 거였는데 쉽지 않은 행정업무로 난데없이 우리는 잠시 불법체류자로 몇 달을 버티기도 했었어. 아무도 해결할 수 없고, 연락도 할 수 없는 담당자를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이 와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들었을 땐 다 같이 웃어버렸어. 재미있는 이야기지. 내가 그나마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야. 아, 대통령도 해결할 수 없는 거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라고 말이야.
프랑스에서는 흔한 이야기였고, 늘 불만을 가지는 이야기들이 가득했지만 모두가 그러려니 하는 현실이었어. 한국에서는 민원을 넣고, 전화를 해서 어떻게든 순식간에 어쩌면 몇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몇 달이 더 걸릴 지도 모를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었어. 얼마나 걸린다는 보장만 있다면 사실 그것도 괜찮은 예상이기도 했지. 하지만 실상은 기한도 없이 그저 기다리고 기다릴 뿐이지만.
헤어질 것이 많은 인생
우리는 프랑스가 늘 그리워. 니스가 너무 보고 싶어. 모두가 들판이나 공원에서 뛰어놀고 어떤 옷을 입어도 어떤 말을 해도 자유로웠어. 각자도생인 프랑스에서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었지.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 너무나 아름다웠고, 즐거웠던 거 같아. 물론 무섭고, 답답했던 일도 많았지만 말이야.
우린 모두 헤어질 것이 많은 인생을 살고 있어. 이별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정말로 이별할 때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소소한 일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스쳐 지나가는 바람조차 그리울 때 나는 그때가 제일 즐겁고, 행복했어.
그리움에 대한 즐거운 행복은 수많은 인생에서 그 무언가를 회복하기 위해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또다시 일어나서 다시 일어나 헤어질 것이 많은 인생을 살아가는 거야. 나는 또 무엇을 놓치고 있지 않을까?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거야. 그게 나의 인생을 흔드는 희로애락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