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포 관리 이론
죽음과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뇌리에 남거나, 사고로 인한 위협에서 간신히 벗어나거나, 유언장을 써보거나, 장례식장에 방문하는 등 우리는 종종 죽음과 가까워지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자연스레 ‘나에게도 죽을 날이 오겠지’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죽음이 깨어나 한동안 생각 속에 머물면 우리 내면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고로 몸을 다치거나, 사랑하는 이와 이별을 하는 등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그러나 잊힌다는 말이 곧 삭제되었음을 뜻하는 건 아니다. 괴로운 과거의 경험은 그저 우리의 내면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겨져 있을 뿐이다. 만약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도 계속해서 과거의 고통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면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다. 다행히도 본능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과거의 경험을 관리하는 장치를 가지고 있다. 심리학적으로 이것은 ‘억압’(repression)이라 불린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틀림없는 사실 또한 평소에 ‘억압’되어 있다. 사실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적절하게 억압될 필요가 있다. 뉴스를 보면 우리를 사지로 몰아넣는 위협은 곳곳에 깔려 있다. 자동차, 비행기, 엘리베이터, 사람, 음식, 심지어 집도 죽음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하지만 언제나 위협을 느낀다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리 없다. 따라서 과도한 긴장상태를 진정시키고 평범한 의식 수준을 유지해주는 장치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억압이다.
그러나 억압은 한편으로 우리 자신도 속인다는 문제를 낳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억압’은 어떤 것이 억압되었는지를 우리 자신도 모르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망각은 삶에서 잘못된 가치관을 생산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만약 우리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곧 죽게 된다면 무엇을 아쉬워할까. 조물주 위 건물주일까. 한강이 보이는 고급 아파트일까. 고급 승용차나 명품 가방일까. 자신의 삶이 언젠가는 반드시 끝난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될까.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은 인간이 죽음을 생각했을 때 일어나는 심리적 변화를 탐구한다. 제프 그린버그(Jeff Greenberg), 셸던 솔로몬(Sheldon Solomon), 톰 피스진스키(Tom Pyszczynski)가 대표적인 연구자들이다. 이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며 인간의 모든 심리현상의 배후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의식적-무의식적 차원에는 ‘자기 보존 본능’이 끊임없이 작동하는데 이런 본능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란 바로 죽음을 경계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며,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떤 계기로 자신의 죽음을 각성하게 되면 억압으로 잠가놓았던 잠금장치가 풀리고 죽음이 의식세계로 진입한다. 죽음이 평범한 이의 삶에서 중요한 생각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공포 관리 이론에서는 죽음 현저성(mortality salience)이 일어난 상태라 부른다. ‘현저(顯著)’란 또렷하게 나타난다는 뜻이다. 곧 무의식세계에 있던 죽음이 의식세계로 나타나 활성화되는 것이다. 공포 관리 이론에서는 죽음 현저성이 일어나면서 인간은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며 이런 생각은 ‘나도 언젠가는 죽겠구나’라는 공포감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형성되면 내면에서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안정감을 얻기 위해 죽음의 공포를 ‘관리’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내면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불안감을 처리하기 위한 어떤 방어 장치가 내재해 있을까? 바로 ‘문화적 세계관’(cultural world view)과 ‘자존감(self-esteem)’ 두 가지다.
문화적 세계관에서 ‘문화’란 매우 포괄적인 의미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전달받고, 공유하는 행위 양식을 말하는데 의식주를 비롯해, 언어, 종교, 학문, 예술, 정치, 제도, 윤리, 도덕 등 한 사회를 구성하는 통합적인 체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세계관’은 개인의 내부에 형성된 문화적 체계를 바탕으로 외부의 세상을 해석하는, 일종의 ‘안경’을 뜻한다. 쉽게 말해, 문화적 세계관이란 한 개인이 어떤 집단 속에서 성장하며 습득한 언어, 풍습, 종교, 사상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컴퓨터와 마찬가지로 한 개인에게 말소리나 글자 등으로 특정 언어가 전달되면 내부에 축적된 문화적 데이터를 통해 해석하는 작업이 일어난다. 만약 누군가로부터 욕을 듣는다면 그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해석하게 되고, 이후 이것이 나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인지, 그저 장난으로 넘길 상황인지를 구별해 조치를 취한다.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세계에 잠들어 있던 죽음이 의식세계로 진입하면 우리 내면에 저장되어 있던 문화적 세계관이 죽음을 분석하고 해석해 처리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분석과 해석을 통해 문제 해결 과정을 거치고 나면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불안이 진정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문화적 세계관은 죽음의 공포를 완충(buffer)하는 기능을 한다.
그렇다면 종교적 측면에서는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심각한 병에 걸리면 평소보다 더 기도에 몰두하거나 기도를 잘 하지 않던 사람도 기도를 하는 경우가 있다. 신이나 부처님이 구원과 자비의 손길을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임박한 경우, 기도의 불길은 더욱 거세질 수도 있다. 다가오는 죽음을 막지는 못해도 사망 후 천국이나 극락에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도를 하는 이유와 방식, 마음가짐은 당사자가 속한 종교의 가르침에 따른다. 인간은 종교를 통해 죽음을 저지할 수 있고 혹은 육신의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삶이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종교적 세계관을 통해) 죽음의 공포를 누그러뜨린다.
종교뿐 아니라 윤리나 도덕 또한 죽음의 공포를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어떤 악인이 죽으면 “남한테 못된 짓을 저지르니 벌 받은 거야”라 하거나 혹은 천수를 누리고 호상을 당한 누군가에게는 “저 양반은 살아 있을 때 항상 남한테 베푸는 걸 좋아했고 친절했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선한 행위가 죽음을 뒤로 미룰 수 있고 악한 행위가 죽음을 앞당길 수 있다는 생각은 죽음이 윤리나 도덕과도 연관되어 불안을 완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문화적 세계관이 죽음의 공포를 관리하고 방어하는 방법이다.
죽음의 공포에 대한 방어를 담당하는 나머지 하나는 ‘자존감’(self-esteem)이다. ‘자아존중감’이라고도 불리는 자존감이라는 말은 1990년대부터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자존감과 유사한 말인 ‘자존심’은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을 뜻하지만 자신의 행위가 객관적으로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긍정하는 태도다. 그러나 자존감은 자신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평가하는 태도를 포함해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자존감은 부정적인 사건의 충격에서 자아를 보호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게 하거나,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자존감이 높으면 타인에게 비판을 받거나 서로 충돌한 경우 상대방의 입장을 수용해 원만하게 해결하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비교적 쉽게 극복하기도 한다. 반대로 자존감이 낮으면 타인과의 불화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자기혐오, 우울, 불안, 열등감 등 부정적인 심리에 지배당하곤 한다.
자존감은 유아기부터 가족과 사회 안에서의 지속적인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특히 부모와의 관계가 자존감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그리고 계속해서 성장하면서 부모를 비롯한 형제자매 등 가족, 학교, 지역사회, 국가 등 자신이 속한 문화 속에서 점차 완성되어간다. 자존감이 소속된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점은 결국 자존감 또한 문화적 세계관과 밀접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포 관리 이론에서는 자존감이 문화적 세계관과 함께 죽음의 공포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맡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각성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나 불안이 엄습하고 이후 ‘자존감’과 ‘문화적 세계관’이라는 방어체계가 등장한다. 공격에 대해 안정적인 방어가 이루어지려면 당연히 방어체계가 견고해야 하므로 죽음이 현저해질수록 자존감과 문화적 세계관도 강화된다. 따라서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면 한 개인은 종교 활동이나 도덕적 행위를 통해 자신의 문화적 세계관을 공고히 하고 문화적 테두리 안에서 ‘안정성’을 부여받는다. 또한 자존감은 낮아지는 게 아니라 증가하는 방식을 택해 강화된다. 문화적 세계관 고수와 자존감 증가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불안 완충(anxiety buffer) 작용을 하는 셈이다.
공포 관리 이론에서는 죽음에 대한 사유는 문화적 세계관과 자존감을 작동시키며 이는 내면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유도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한 예로는 품라 고보도(Pumla Gobodo)의 ‘죽음에 대한 각성이 화해, 용서, 타인과의 공존을 중시하는 태도를 증가시켰다’는 연구, 매튜 갤리엇(Matthew Gailliot)의 ‘자신의 죽음에 관한 에세이를 작성한 후 인종적 편견의 감소했고 타인에 대한 선행을 중시했다’는 연구가 있다. 에바 요나스(Eva Jonas)의 ‘죽음에 대한 자각이 자선행위를 증가시켰다’는 연구, 케네스 베일(Kenneth Vail)의 ‘죽음에 대한 사유가 외면적 가치(외모, 명성, 부)보다 내면적 가치(삶의 의미, 타인과의 관계)를 중시하게 했다’는 연구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평소 어떤 음악, 드라마, 연예인, 게임, 스포츠 등에 자주 관심을 갖는다. 이런 것들은 곧 생각의 대상이 된다. 언제 어디서나 문득 혹은 진지하게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들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 죽음은 늘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꼭 그래야 할까. 죽음도 평소 즐겨 생각하는 하나의 주제로 삼으면 놀랍게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위한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는 ‘유언장 쓰기’나 앞서 소개했던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두 가지를 추천하고 싶다. 만약 이 두 가지가 부담스럽다면 죽음을 주제로 한 영화나 책을 종종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정기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의식하지 않아도 거의 자동적으로 우리 마음에 내장되어 있는 장치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무의식이 죽음을 해석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세계관이 강화되고 자존감이 상승한다. 또한 종교심이나 도덕성이 강화되면서 타인과 조화를 이루려는 쪽으로 변화한다. 시한부 환자처럼 강제적으로 죽음과 가까워진 상태나 자살 같은 왜곡된 방식으로 죽음과 가까워지는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공포 관리 이론은 적어도 심신이 건강한 상태에서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놀랍고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