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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공 Mar 31. 2019

남의 죽음, 너의 죽음, 나의 죽음

‘고교생 등 459명 탄 여객선 침몰…… 293명 생사불명’ ‘사이클론에 모잠비크, 미국 중서부 등 사망자 1000명 이상’ ‘뉴질랜드 총격 테러 사망자 수 50명으로 늘어’ ‘수면 방해한다고 4살 여아 폭행 사망케 한 중학생 체포’ ‘음주사고 뒤 방치…… 전역 두 달 앞둔 군인, 안타까운 사망’ ‘군인 아들 면회 후 가족 4명 및 연인 사망’…….      

우리는 뉴스 기사를 통해 수많은 죽음을 하루에도 몇 번씩 목격한다. 인재(人災), 자연재해, 전쟁, 테러 등으로 인해 한 번에 많은 사람이 사망한 경우도 있고 사고, 범죄, 자살 등으로 개인이나 가족이 사망한 경우도 많다. ‘그럴 만했네’라고 느껴지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너무나 안타깝고 황당한 죽음도 많다. 


대개 죽음은 비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우리는 지하철이나 버스 안, 화장실 등에서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는 마음으로 타인의 죽음이 실린 기사를 무덤덤하게 읽는다. 그런 기사를 보고 오열하지는 않는다. 아직까지 나는 지하철에서 누군가가 죽었다는 기사를 보고 오열하며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무심히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고 스포츠나 연예 등 더 재미있고 관심이 가는 기사로 옮겨 갈 뿐이다. 타인의 죽음은 그저 손가락으로 넘겨지는 화면 속 사건일 뿐이다.     


그러나 죽음이 사랑하는 이나 자기 자신과 가까운 이의 일이 되면 다른 문제로 다가온다. 아마 대학교 2학년쯤이었을 것이다. 밤늦은 시간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놀고 있는데, 문득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라고 하자 전화기 저편에서 대답보다 먼저 “흐흐흑……” 하는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 순간, ‘아버지한테 무슨 일이 생겼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 순간 정신이 멍해지고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시, “여보세요”라고 재촉하자 그제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왔어. 협심증 진단을 받아 입원했으니까 서둘러 병원으로 오렴.” 내게는 천만다행히도, 나를 놀라게 했던 흐느낌 소리는 병원의 다른 누군가가 내는 소음일 뿐이었다. 늦은 밤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으로 갔다. 협심증은 간단한 시술을 받고 관리만 잘하면 큰 문제없는 병이란 말을 간호사에게 듣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잠든 아버지 곁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면서 죽음이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기사로 접하는 타인의 죽음은 손가락으로 넘겨 재빠르게 스쳐 지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000 씨 되시죠. 000 환자분이 위독하십니다. 빨리 응급실로 오십시오”라는 전화를 받는다면, 혹은 몸이 좀 안 좋아서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의사가 숨을 고르고는, “몇 개월 안 남으셨습니다. 준비를 하셔야……”란 판정을 받는다면 어떨까. 그때도 그렇게 스마트폰 위에서 손가락을 재빨리 움직이듯 휙 넘겨버릴 수 있을까. 죽음이 사랑하는 이, 혹은 나의 것이 되면 과연 어떻게 될까.      


사실 기사에 나온 죽음은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일 것이고, 어쩌면 그 자신의 죽음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사람이 있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 죽음이 사랑하는 이에게 닥치거나 나의 문제가 되어버린 일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는 《죽음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죽음을 1인칭, 2인칭, 3인칭의 세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했다. ‘인칭(人稱)’이란 어떤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1인칭은 ‘나’, 2인칭은 ‘너, 당신’, 3인칭은 ‘그, 그녀, 그것’을 의미한다.     


장켈레비치는 1인칭 죽음은 ‘나의 죽음’이며, 2인칭 죽음은 ‘너의 죽음’, 3인칭 죽음은 ‘익명적인 타인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1인칭, 즉 나의 죽음은 말 그대로 죽음이 나의 것이 된 상태를 뜻한다. 2인칭인 너의 죽음은, ‘너, 당신, 그대’로 지칭할 수 있는 가까운 이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3인칭 죽음은 자신과 별 관계없는 기사에 나타나는 타인의 죽음, 즉 ‘남의 죽음’을 뜻한다.      


‘시점(視點)’ 또한 인칭과 비슷한 의미가 있다. 시점의 ‘시(視: 보다)’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시점은 ‘시선이 출발하는 지점’을 의미한다. 1인칭 시점의 예로 1인칭 게임을 들 수 있다. 즉 화면에 내 손이 보이고 내 눈 앞에 있는 적을 처치하는 방식이다. 이와 달리 3인칭 시점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관찰자의 시각에서 등장인물과 상황을 외부에서 지켜보는 상태를 말한다. 결국 ‘시점’을 통해 죽음을 보면, 1인칭 시점에서 죽음은 내 눈앞에서 죽음이 ‘나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2인칭 시점에서는 내가 보고 있는 ‘너에게 죽음이 다가가고 있는’ 것으로, 3인칭 시점에서는 죽음이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느껴질 것이다.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하이데거, 야스퍼스, 레비나스, 들뢰즈 같은 실존주의 철학가들이 언급했는데 장켈레비치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죽음을 타인의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강조한다.      


사실 ‘나’의 죽음은 내가 죽기 전까지는 경험할 수 없고 다른 이에게 알려줄 수도 없다. 그것을 경험하는 순간이 바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의 죽음’은 내가 죽기 전까지 여러 번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장켈레비치는 특히 2인칭 죽음을 강조했다. 2인칭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며 또한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타인의 죽음도 아니다. 죽는 당사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므로 나는 계속 살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네’가 죽어가는 것, ‘네’가 죽은 모습을 보게 된다. ‘너’, 즉 사랑하는 이, 부모, 형제자매, 자식, 친구, 반려동물 등의 죽음은 우리가 죽음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뜬눈으로 지켜보며 비로소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나에게도 언젠가 다가올 사건으로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지금 죽음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그렇다. 전공이 죽음이긴 하지만 죽음이 나와 가깝다고 확실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혹한기나 혹서기 날씨처럼 죽음을 ‘체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 시한부 환자처럼 죽음이 거의 정해진 경우라야 나의 죽음에 대한 확신이 생길 것이다. 그때는 죽음이 남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나의 것이다. 시한부 환자에게는 ‘다음에 한번 보자’, ‘언제 한번 보자’라는 말이 의미를 잃는다. 오로지 숨 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이 확실한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간혹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시간을 빨리 보내버리고 싶은 때가 있다. 단순하고 지겨운 일을 반복하거나, 혹은 무언가로 인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시간 따위가 그렇다. 이와는 반대로 주말, 방학, 휴가, 연휴, 해외여행 같은 즐거운 시간은 빨리 와주길 기다리며, 오히려 지금의 시간을 죽이며 소비해버리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신병훈련소에 들어가기 전, 가족과 떨어져 해외 파견을 떠나기 전, 말기 암 판정을 받았을 때, 어딘가로 떠날 수밖에 없는 날이 정해진 경우에는 내가 헛되이 쓴 나의 시간, 그리고 가까운 이들과 공유했던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하루 이틀, 1시간 2시간, 일분일초,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나도 아깝다. 아침밥을 먹니 안 먹니, 이거해라 저거해라 잔소리하던 엄마, 아빠, 가족과의 시간이 벌써부터 그리워진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 그제야 함께하던 시간이 소중했음을 알아차린다. 왜 그때는 그렇게 못 참고 짜증만 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장켈레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끝없이 미루고 지연시키면서, 죽음을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의 것으로만 떠넘긴다면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 셈이다.” 그렇다. 우리는 매일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을 기만하는지 모르겠다. 죽음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면서 세상의 죽음이 나와 관계가 없다고 믿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에 끝이 없는 축제란 없듯, 죽음이 없는 탄생도 없다. 죽음은 그저 뉴스 기사에만 오르내리는 남의 소식이 아니다. 죽음은 우리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 각자에게 모두 하나씩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 죽음은 결국 우리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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