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현공 Apr 04. 2019

후회에 대하여

“너는 돌 때 실을 잡았는데, 명주실을 새로 사서 놓을 것을, 쓰던 걸 놓아서 이리되었을까. 엄마가 다 늙어 너를 낳아서 배 속에 오래 품지도 못하고 빨리 낳았어. 한 달이라도 더 품었으면 사주가 바뀌어 네가 살았을까. 엄마는 모든 걸 잘못한 죄인이다. 몇 푼 벌어보겠다고 일하느라 마지막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엄마가 부자가 아니라서 미안해. 없는 집에 너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 엄마가 지옥 갈게. 우리 딸은 천국에 가.”

-세월호 안산 합동 분향소에 쓴 한 어머니의 편지


돈 버느라 자식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한 어머니의 후회를,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후회들을, 어떻게 감히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자식을 잃은 뒤의 후회와는 반대의 경우로, 부모를 보내고 난 뒤 느껴지는 후회도 있을 것이다. 아침부터 밥 먹으라는 귀찮은 소리에 짜증을 내고 집을 나섰는데 얼마 뒤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한다면 얼마나 지독한 후회를 할 것인가. 짜증내지 말걸, 즐겁게 함께 밥 먹을걸, 잘해드릴걸, 사랑한다 말할걸…….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후회를 한다. 큰 후회, 작은 후회,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후회,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후회 등. 자기 자신에 대한 후회로는 노력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가 대부분일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항상 시험공부는 닥쳐서야 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벼락치기로 공부할 땐, ‘힘들다. 다음부터는 미리 계획하고 차근차근 해야지’ 하고 결심하지만 결국 또 시험 때가 되면 벼락치기를 하고 있었다. ‘진짜 다음부터는……’이라고 생각만 할 뿐 늘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학생 때는 영어 숙어 외우기가 참 힘들었는데, ‘should have pp(~해야 했는데)’만큼은 유독 쉽게 외웠다. 아마도 이 숙어가 내 인생이 많은 후회로 차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벼락치기 습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많은 사람이 새해가 되면 공부, 금연, 독서, 운동, 다이어트 등을 계획한다. 하루 정도 열의를 불태우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휴. 힘드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하자. 오늘은 연습이라 생각하고.’ 그러다 며칠이 지나면 은근슬쩍 다른 맘이 생긴다. ‘진짜 다음 달부터 하자. 계획은 월초부터 새로운 마음으로 실천하는 거지!’ 그리고 다시 얼마 뒤, ‘그래 설날이 진짜 새해지. 설 지나고 꼭 제대로 해보자!’ 그렇게 해서 새해 결심은 3월, 4월을 넘어 결국 연말까지 넘어간다. 다시 또 새해가 밝아오면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또 실천을 하루 이틀 미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간다. 이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인생이 점점 계획한 대로 되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작은 후회가 뭉쳐 돌이킬 수 없는 큰 후회가 되어간다.


후회란 무엇인가? 후회에서 ‘후(後)’는 ‘뒤’, 즉 과거를 말하고 회(悔)는 ‘뉘우치다’로 과거를 뉘우친다는 뜻이다. 한자 ‘悔’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글자는 ‘마음’을 뜻하는 심방변(忄)과 ‘매번’을 뜻하는 매(每) 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근거로 다시 한번 후회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면, ‘매번 뒤(과거)에 마음이 간다’가 된다. 


한번 생각해보자. 미래를 후회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후회라는 말에 이미 ‘뒤(과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회는 반드시 과거에만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의 현재에도 존재할 수 없다. 후회는 반드시 지나고 나서야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듯 후회가 일어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정신적 기능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후회는 사후가정사고(counterfactual thinking)라고도 한다. 즉 어떤 일이 끝난 후,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해 ‘~했다면 ~했을 텐데’라고 가정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다르게 행동했다면 지금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있었다는 상상과 함께 긍정적이지 않은 감정을 동반하는 현상이 후회이다. 따라서 후회는 과거와 현재와의 ‘비교’라는 인지 과정(지각과 사고작용)과 과거의 행동에 대한 정서(감정 또는 기분)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후가정사고는 ‘상향적 사후가정사고’와 ‘하향적 사후가정사고’로 나뉜다. ‘상향적 사고’는 일어났던 상황을 더 좋은 상황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내가 열심히 공부했으면 더 좋은 대학에 가서 성공했을 텐데’, ‘내가 그때 억지로 병원에 모시고 갔다면 더 사셨을 수도 있을 텐데’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향적 사고’는 이와 반대다. ‘이 정도라 다행이지. 큰일 날 뻔했다’ 하며 일어난 일이 더 나쁠 수 있었다고 가정하는 식이다. 한마디로 상향적 사후가정사고는 부정적인 생각, 하향적 사후가정사고는 긍정적인 생각을 뜻한다.


후회의 부정적인 측면은, 후회가 실패나 좌절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우울증, 삶의 만족도 저하 등 행복감을 감소시킨다는 점이다. 반대로 긍정적인 측면은 후회를 통해 실패했던 일을 극복해보려는 의지가 일어난다는 점도 있다. 이는 삶을 변화시키는 동기가 되기 때문이다.


코넬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토마스 길로비치 연구팀은 한 연구를 통해 “후회의 대상은 ‘행동한 것’과 ‘행동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되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행동한 것보다는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 더 많이 후회했다”라고 밝혔다. 사실 내 경험만 봐도 그렇다. 나 자신도 습관적으로 후회를 많이 하는데 그중 거의 80퍼센트는 ‘그렇게 해야 했는데’란 생각이 차지하니까. 물론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한 중학교에서 죽음에 관해 교육한 적이 있다. 학생들에게 ‘죽음’을 가정해보라고 주문한 뒤에 엔딩노트(일종의 유서다) 작성을 과제로 내주었다. 학생들이 작성한 내용을 분석해보니 ‘만약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가족과 함께 남은 시간을 보내겠다’가 36.3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겠다’가 25퍼센트로 그 뒤를 이었다. 학생들은 몰랐겠지만, 실제로 많은 말기환자들이 가족과 여행을 가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학생들은 죽음을 ‘가정’한 상태였으나 실제로 죽음을 앞둔 이들이 한 후회와 유사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는 혹시 죽음과 여행이 심리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게 한다. 만약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죽음과 여행의 심리적 관련성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하고 싶다.


그렇다면 실제로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은 어떨까. 호스피스 전문의인 오츠 슈이치는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에서 말기환자 가운데 거의 대부분이 죽음의 문턱에서 후회를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말기환자라고 해서 뭔가 거창하거나 특별한 후회를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살아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더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가보았더라면’ 등의 일상적인 후회다. 앞서 학생들이 엔딩노트에 적은 소망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 바람이나 소망을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일반적으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한다고 표현하길 어려워한다. 꼭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나서야, ‘사랑한다 말할걸. 미안하다 말할걸……’하는 후회가 생기는 것이다. 슈이치는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드라마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말할 수 있는 상황은 환상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임종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사랑한다고 말하기엔 늦다.



가족들과 제대로 여행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몇 해 전에 내가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아마도 학생들의 엔딩노트 과제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 자신에게 큰 후회를 남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 분 모두 지병이 있고 바쁘게 생활하는 터라 일정을 맞추기 어려웠고, 부모님은 태어나서 한 번도 해외에 가본 적이 없으셨기에 첫 가족여행은 해외로 가겠다고 마음먹고 준비했다. 그러나 실제로 여행을 떠나기까지는 거의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힘들게 준비를 마치고 가까운 일본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갔다.


그러나 두 분의 몸 상태는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좋지 않았고, 거기에 더해 어설프게 짠 내 여행 계획이 매번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교토는 아름다운 풍경을 뽐내고 있었지만, 관광을 하는 내내 아버지는 숨차 하셨고 어머니의 얼굴은 피곤으로 어두워졌다. 가이세키 요리는 꼭 찾아가서 먹어보리라 다짐하던 음식이라 한껏 기대했지만 두 분 다 너무 지치셨다. 저도 모르게 찡그려지는 부모님의 얼굴을 흘끗 본 나는 근처의 라멘가게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차를 한잔하며 잠깐 다리를 쉬다가 다시 계획한 여행 코스를 재촉했다. 가는 곳마다 관광객으로 문전성시였고 유명한 관광 포인트는 잠깐 사진을 찍는 것만도 어려웠다. 청수사를 차분히 살펴보려 했지만 입구까지만 갔다가 내려왔다. 오사카 시내를 거쳐 숙소로 돌아오는 강행군이 끝나자 부모님은 그제야 살겠다며 서둘러 침실로 들어가셨다. 물론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비슷한 모습이 연출됐다.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뒤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넘겨보았다. 생각해보니 이국적인 풍경을 즐기며 행복해하는 부모님의 표정보다는 힘들어하셨던 모습만이 기억에 남았다. ‘아, 내가 부모님을 너무 늦게 모시고 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씁쓸하고 우울한 기분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무는 고요히 있고자 하지만 바람이 멈추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지만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덧 나도 언제 찾아올지 모를 이별을 준비해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따뜻한 대화를 나누겠다는 환상은 없으니까. 그러기 위해 적어도 지금 후회할 일은 하지 않겠노라 다짐해본다. 기왕의 후회는 어쩔 수 없더라도, 앞으로의 후회는 역시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후회는 반드시 지금이 지나고 과거로 가버려야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사실상 문제 해결의 열쇠는 ‘지금’에 있다.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으면 지금 과거의 일을 후회하면서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여러 번 했던 후회를 ‘지금 또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에게 끝없이 질문해야 한다.


오츠 슈이치는 “살아 있을 때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사람들은 굉장히 괴로워했다”라고 말한다. 어떤 상황이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어쩌면 그것이 베일에 가려져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종종 어떤 사건이 닥치기 전에 미리 예상하고 준비해놓으면 그게 걱정했던 만큼 우려할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혹은 나 자신의 죽음 또한 그렇지 않을까. 병상에 누운 다음이 아니라 건강할 때 종종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 따뜻한 눈빛과 말을 전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그리고 죽음이 다가왔을 때 조금은 더 침착하게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 남의 죽음, 너의 죽음, 나의 죽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