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였던 눈이 녹았다가 이내 다시 얼어 빙판길이 되어버린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급하게 가족회의가 열렸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아버지가 그날 아침 느닷없이 동물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새벽에 누군가가 길에서 개 한 마리와 갓 낳은 강아지들을 발견해서 119센터에 신고했고 가까운 동물병원에 데려다놓았는데, 평소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동물병원 원장님이 아버지에게 연락해 강아지를 기를 수 있느냐고 물어온 것이다.
일단 우리 가족이 맡아 기르기로 하고 병원에 가서 사연을 들어보니 상황은 더 안타까웠다. 새벽녘에 어미개가 한적한 골목 담벼락 밑에서 새끼를 네 마리 낳았는데, 날이 너무 추워 세 마리는 죽고 한 마리만 겨우 살아남았다. 어미는 옅은 갈색의 몰티즈 순종처럼 보였는데 새끼는 갈색과 흰색이 섞인 믹스견이었다.
우리 가족은 집 마당 한쪽에 포근한 잠자리를 마련해주고 강아지들을 애지중지 길렀다. 어미와 새끼 둘 다 영리하고 말을 잘 들었다. 평소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서 목줄을 풀어주고 길렀는데 종종 울타리 밖으로 빠져나가 돌아다니다가도 끼니때가 되면 부엌 앞에 와서 얌전히 앉아 있곤 했다. 무슨 생각에서 그렇게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어미에게 말자, 새끼에게 영자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처음에는 약간 신기한 마음이었지만, 이내 우리는 서로 없이는 못 사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다.
여러 매체나 자료를 보면 최근 반려동물을 기르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보다 길에서 반려동물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만 봐도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그만큼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 수준도 높아졌다. 이제는 개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가족과도 같은 생명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에 따른 상실의 고통도 증가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평균 수명은 70세지만 반려동물의 수명은 평균 12년이다. 따라서 반려인 대부분은 반려동물의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가족의 일원이었던 반려동물이 죽거나 실종되면 한동안 충격과 슬픔 탓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 수도 있다. 심한 경우 그러한 상실감은 우울증으로 이어지거나 불면증 같은 정신적 장애를 동반하기도 한다. 펫로스 증후군이 대표적인 예다.
반려동물과 애착 관계가 강했던 사람일수록 그에 따른 고통도 클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반려동물은 사람과는 달리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받아주고 깊은 애정을 준다. 반려동물의 상실은 사실상 가족을 잃은 슬픔과 유사한 정서적 고통을 남길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랬다. 말자, 영자와 함께 산 지 2년 남짓 되었을까. 그날도 한겨울이었는데 말자가 늦은 저녁부터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병원이 문을 닫은 시각이라, 다음 날 아침에 데려가려고 미리 준비를 하고 따뜻한 물을 주고 이불을 깔아주었다. 말자는 원래 개집 가까이 가면 항상 꼬리를 흔들며 나왔는데 그날은 정말 몸 상태가 별로인지 고개만 들어 이쪽을 보면서 옆으로 누운 상태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날이 밝기를 기다리면서 마침 방학이라 와 있던 사촌 동생과 교대로 말자를 지켜보다가 새벽에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서 채비를 하고 말자를 데리러 나서려 했는데, 말자는 여전히 옆으로 누워 있었다. 이름을 불러도 움직임이 없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말자의 코에서 피가 흘러 굳어 있었다. 말자의 몸은 이미 싸늘했다. 사촌 동생은 그런 말자를 보면서 울기 시작했다. 나도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왠지 창피해서 혼자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삼켰다.
가까운 산으로 동생과 함께 말자를 안고 갔다. 겨울이라 땅이 얼어서 힘들게 땅을 팠다. 꽝꽝 언 땅에 딱딱하게 굳은 말자의 몸을 뉘었다. 길가에 새끼를 낳고 음식을 주워 먹으며 생활했던 말자. 새 가족을 만나서 잘 지낼 줄 알았는데 말자는 고작 두 해를 보내고 다시 길을 떠났다. 무덤 위에 동그랗게 봉분을 만들어주고 나는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너무나 아팠을 텐데, 누워서라도 나를 보며 힘겹게 꼬리를 흔들던 말자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차가운 흙바닥에 절을 하고 일어섰는데 눈물이 흘러 얼굴이 조금 따뜻해졌다.
인간의 사별과 유사하게 반려동물의 실종이나 죽음 이후의 고통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내 경험도 그랬다. 말자가 죽고 난 뒤 한동안 말자가 없는 빈 집, 밥그릇, 물그릇이 유난히 또렷하게 보였다. 늦은 밤 집 밖에 나와 아직 귀가하지 않은 나를 기다리던 말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면 슬픔이 올라왔다.
반려동물이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도 괴롭지만 질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더욱 괴로울 수 있다. 때로는 안락사를 할지 말지 선택해야 할 순간에 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흔히 ‘내가 감히 한 생명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물론 안락사는 힘든 판단이며 선택은 반려인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동물 호스피스 전문가 리타 레이놀즈는 《펫로스: 반려동물의 죽음》에서 말기 암 혹은 사고로 인한 치명적인 부상에는 안락사가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다고 권유한다.
많은 반려인들이 자연사를 원하지만 큰 통증으로 고통받는 동물에게 자연사는 오히려 자연사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레이놀즈는 “제발 날 두고 가지마. 너 없이는 못 살아”란 말보다는 “괜찮아. 이제 가도 돼. 널 지켜보고, 덜 힘들게 떠날 수 있도록 도와줄게”라고 이야기하도록 권한다.
누군가가 떠나고 난 뒤 느끼는 슬픔은 오로지 남은 자의 몫이다. 쉽게 보내주지 못하는 미련은 어쩌면 죽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누구나 반려동물과 이별한 뒤에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슬픔을 느끼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세상에는 상실의 고통을 겪고 슬퍼하는 수억 명의 사람이 있다. 외로움이란 우리가 살면서 겪어내야 할 당연한 감정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물을 보내야 하는 경우에도 수용, 즉 ‘받아들임’의 태도를 머릿속으로 떠올릴 필요가 있다. 반려동물이 죽은 뒤 평소 즐겨 놀던 장난감이나 밥그릇 같은 유품을 정리하지 않거나, 오랜 기간 슬픔에만 갇혀 있는 행위는 내가 사랑하던 반려동물의 죽음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을 대변한다. 반려인들은 반려동물의 죽음을 두고 ‘무지개다리를 넘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반려동물이 편안하게 무지개다리를 넘을 수 있도록 그들을 잘 보내주는 것도 한때 사랑하던 대상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사랑에 적당한 때가 있듯 이별에도 적당한 때가 있다. 때가 되었을 때 놓아줄 수 있는 힘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오롯이 수용하는 순간 생겨난다.
동물들도 동료나 가족의 죽음을 오랫동안 애도한다고 한다. 연구에 따르면 자연 상태의 침팬지나 코끼리가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어떤 생명이 수명을 다할 때 떠나가는 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와도 같다. 그 섭리를 굳이 상실이라는 관점에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생명은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는 순환의 고리 속에 있다. 반려동물의 죽음을 보며 슬픔에만 매몰되어 있지 말고 때가 되면 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경건한 자엽의 섭리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