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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공 Jun 05. 2019

나의 죽음에 대해

몇 개월 전부터 속이 불편하고 소화가 잘 안 되는 느낌이 든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한다. 의사가 결과를 보더니, 추가로 조직검사와 CT검사까지 권한다. 지루한 검사가 끝나고 진단 결과를 듣기 위해 별생각 없이 진료실에 앉아 기다린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본다. 스쳐 가는 눈빛으로 나를 흘끔 보더니 뜸을 들이다 이내 입을 연다. “위암 말기입니다. 식도, 간, 췌장까지 전이되었네요. 항암치료를 하겠지만 심각한 경우 3개월 뒤면…….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만약 위와 같은 일이 나에게 벌어진다면 어떨까. 죽음이 향하는 방향이 전혀 모르는 남이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라 나 자신이라면, 자기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수많은 이들을 찾아간 죽음이라는 손님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를 ‘잘 맞이해’줄 수 있을까.    

 

죽음이 나의 일이 되어버리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래? 할 수 없지!’ 혹은 ‘역시 이럴 줄 알았어!’라고 하면서 쾌활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감사하게도 퀴블러로스는 우리 모두가 통과하게 될 죽음의 과정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타임》지에서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에 선정되기도 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1926년 스위스에서 세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 똑같이 생긴 자매들을 보고 자라면서 퀴블러로스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어느 한적한 스위스 시골 마을에서 보낸 퀴블러로스는 19세에 폴란드의 마이데넥 유대인 수용소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봉사를 할 당시 퀴블러로스는 비참하게 죽어간 이들이 수용소 벽면에 그려놓은 수많은 나비를 목격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경험은 그녀가 훗날 죽음을 탐구하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퀴블러로스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머물며 평생을 시한부 환자들을 위한 정신치료에 투신했다. 그러면서 인간이 다섯 가지 단계의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만약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판정받게 되면 처음 일어나는 반응은 무엇일까. 퀴블러로스는 그 첫 단계가 부정이라 말한다. 즉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자신이 몇 개월 뒤 사망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은 뒤에는 마치 넋 놓고 있다가 느닷없이 상대에게 한 대 맞고 놀란 것처럼 큰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짜 나인 거야?’ ‘왜 하필 나야?’ ‘왜 지금이지?’ ‘다른 환자 진료기록을 잘못 본 거 아니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이렇게 멀쩡한데. 안 되겠어. 큰 병원으로 가봐야지.’ 온갖 부정의 속삭임이 꼬리를 문다. 내가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없는, 마치 꿈같은 일인 것이다. .


부정의 단계가 지나면 분노의 단계로 진입한다. 분노 대상에는 타인, 가족, 의사, 친구, 심지어 신, 붓다, 하느님과 같이 종교의 대상까지 포함된다. ‘저기 있는 인간들은 참 즐거운가 보네. 뭐가 저렇게 재미있다고 웃고 떠들지?’ 하며 타인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는 것은 기본이다. “왜 이렇게 아프기만 하고 전혀 차도가 없냐고! 밤새도록 아파서 잠도 못 잤어! 당신들이 아프면 이렇게 내버려 두겠나!”라고 의료진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사소하게는 먹는 것도 분노의 원인이 된다. 곁에서 음식을 먹는 가족을 보면서 환자는 ‘나는 이렇게 아파서 잘 먹지도 못하는데, 너는 참 잘도 먹네’라고 분노하는 것이다. 또 날이 갈수록 피골이 상접해가는 자신과는 달리 건강한 가족의 모습을 보고 질투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주인공 이반 일리치가 바로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 환자가 된 일리치는 건강한 아내를 바라보며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낀다. “일리치는 아내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훑어보고 나서 하얀 살결과 통통한 몸, 깨끗한 손,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 반짝거리는 두 눈을 못마땅한 표정을 쳐다보았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아내를 증오했다. 아내의 손길이 조금만 닿아도 증오심이 치밀어 오르며 고통스러웠다.” 죽음은 결국 자기만의 것이고 쇠락해가는 몸뚱이는 오직 자신의 몸뿐이다.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환자에게는 질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퀴블러로스는 주변 사람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는 단계가 바로 이 분노 단계이며, 이 시기를 잘 지나갈 수 있도록 모두가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타오르는 불길과 같은 분노의 단계가 사그라지면 타협 단계로 넘어간다. 당사자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이 나에게 주어졌으면……’ 하고 바라는 상태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현실을 서서히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게 된다. 의사의 말도 적극적으로 따르고 짜증만 부리던 가족에게도 미안해한다. ‘제가 그동안 착한 일 한 적도 별로 없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딱 한 번만 기회를 더 주신다면 좋은 일만 하며 살겠습니다’라고 평소에는 잘 하지 않았던 기도를 신에게 드리기도 한다. 


퀴블러로스는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이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때마침 이 시점에 내 병을 낫게 해줄 신약이 개발되지 않을까?’ ‘획기적인 새로운 치료법이 나오지 않을까?’ ‘신이 나에게 기적을 베풀어주실 수도 있을 거야’ 하는 식이다. 그러나 병세는 점점 악화되고 통증은 심해지며 거울을 통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은 내가 알던 그 모습이 아닌 다른 이의 몰골로 변해간다. 의사의 처방도 잘 따르고, 생전에 하지 않았던 착한 일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해보았지만 내 생명의 불빛은 점점 희미해져간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네 번째 단계인 ‘우울의 역’에 정차한다. 여기에서 ‘우울’은 단순히 ‘기분이 우울하다’ 정도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울한 기분의 지속, 의욕과 흥미 저하, 수면장애, 식욕 저하 체중 감소, 자살 충동, 무가치감, 죄책감 등이 거의 매일 온종일 나타나는 경우를 우울증이라 말한다. 우울증은 정신활동과 신체활동의 저하까지 동반하며 심각한 경우 자살로 이어지는 심각한 질병이다.



우울이라는 결과를 생산해내는 원인은 다양하다. 자신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심리적 요인과, 망가져가는 자신의 육체를 목격하는 것, 그리고 계속되는 통증 등이 원인일 것이다. 사실 죽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감당키 힘든 것은 지독한 아픔, 즉 통증이다. 통증이란 짐만 없어도 죽음의 여정을 떠날 때 좀 더 가벼운 발걸음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퀴블러로스는 우울의 단계에서 서서히 자신의 생명력이 저하됨을 알아차리고 심리적으로 위축되지만, 비로소 이 단계에서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의 역을 통과하면 마지막 종점은 어디일까. 종착지는 ‘수용’, 바로 ‘받아들임’의 단계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해보고 타인에게 분노를 발산하고 타협도 해보았지만 결국 자신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수용의 단계에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분노와 우울의 단계와 달리, 타인과 더 활발히 교류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남은 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실천하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이들이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퀴블러로스는 수용 단계에서 여러 가지 태도를 관찰한 결과, 최후의 순간까지 저항하며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거나,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자연스럽고 담백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로 나뉜다고 말했다. 


마치 봄이 오면 싹이 돋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듯, 죽음도 때가 되면 대자연으로 다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현상 가운데 하나다. 누군가가 탄생하면 축하를 받으며 함께 기뻐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죽으면 위로하고 슬퍼한다. 물론 죽음이 기뻐할 일은 아니지만 죽음은 시작과 끝의 관계처럼 탄생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지만, 때가 되어 죽는 것에 슬픔과 비참함의 정서만 각인시킨다면 죽음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법하다. 



퀴블러로스는 앞서 이야기했던 죽음에 이르는 단계가 모든 이들에게 순서대로 일어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어떤 환자는 마지막까지 분노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며, 숨이 멎는 순간까지 우울에만 머물러 있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더불어 퀴블러로스는 수용의 태도가 죽음을 포함해 삶의 모든 고난에 대한 매우 중요한 태도라고 말했다. 파산, 이혼, 사고, 실패, 암 선고 등 인생에서 마주하는 지독한 고난을 대할 때도 수용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거나, 애써 묻어두려고만 한다면 더 깊은 진흙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것이 ‘내 것’임을 인정하고 온전히 내면으로 소화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적어도 내 마음속에서 나를 괴롭히는 상황은 종료된다. 상황이 종료되면, 새로운 길이 열리지만, 상황이 종료되지 않으면 새로운 길로 향하는 문은 닫혀 있다. 나의 것임을 알고 포용하면, 마음은 구심점을 잃고 두려움과 고통의 소용돌이에서 헤매기를 중단하고 그 속에서 벗어나 안정감과 침착함을 되찾는다. 그 안정감과 침착함은 우리가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음을 알아차리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극한 환경에서 발휘되는 자비심 또한 그런 예일지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퀴블러로스는 죽음이 삶에서 인간이 배울 수 있는 ‘마지막 성장’의 기회라고 말한다. 죽음이 곧 성장의 기회라면, 죽음이라는 손님이 노크할 때 활짝 웃으며 반기지는 못하더라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맞이해주어야 할 약간의 이유는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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